안형상 우리자산운용 채권운용1팀장은 19일 채권시장이 개장하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평소 거래가 거의 없는 20년만기 국고채를 한 기관투자가가 개장 직후 10억원어치 사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날보다 0.11%포인트나 낮은 금리에 거둬갔다. 전날 금리 수준에서 주문을 내놨던 은행과 증권사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주문 착오가 아닌가 하는 수군거림도 나왔다. 하지만 실거래로 파악되자 국내 기관들은 금리를 급히 낮춰 주문을 다시 내기 시작했다. 안 팀장은 "국채 발행물량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중국 등 외국인이 한국 국채를 집중 매입하자 금리가 급락(채권가격은 급등)하고 있다"며 "이날 대부분의 기관투자가들이 일시 패닉 상태에 빠졌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촉발된 외국인의 채권 매수

익명을 요구한 한 보험사 관계자는 "이날 20년만기 국고채를 집중 매입한 것은 AIG의 대만 자회사인 난산생명보험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난산생명보험은 장중 0.15%포인트까지 금리를 낮춰 1500억원어치 이상을 거둬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전했다.

증권업계에선 난산생명보험은 한국 채권시장에 뛰어든 수많은 외국 기관투자가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 8월부터 중국이 한국 국채를 편입하기 시작해 1년 동안 37억2000만달러(4조3539억원)어치를 사들이자 미국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의 중앙은행과 기관투자가 등도 앞다퉈 한국 채권을 사들이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중국발 한국채권 매입이 외국인 채권매입을 유도하면서 채권시장이 출렁거리고 있다는 얘기다.

이날도 외국인은 3000억~4000억원어치의 국채를 사들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지난 18일엔 하루에 1조2000억원어치(통안채 포함)를 매입했다. 서철수 대우증권 채권운용부 차장은 "2조4500억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액을 무기로 삼고 있는 중국이 한국 국채 매입을 시작한 만큼 다른 외국 투자가들 사이에 더 늦기 전에 사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게 형성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묻지마 매수'주문까지 나와

김형호 아이투신운용 본부장은 "이날 10년만기 국채와 20년만기 국채 등 장기물의 금리가 폭락한 것은 국내 기관투자가들의 '숏 스퀴즈(short squeeze)'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숏 스퀴즈'란 앞으로 금리가 상승(채권가격 하락)할 것으로 예상하고 공매도 주문을 내놨는데 정작 결제할 때 금리가 하락하고 되사들일 수 있는 물량이 줄어들자 가격 불문하고 매수하는 것을 말한다. 국내 기관투자가들은 한국은행의 기준금리(정책금리) 추가 인상을 염두에 두고 금리가 오르는 쪽에 베팅했는데 외국 투자가들이 채권을 지속적으로 사들이자 하는 수 없이 '묻지마 매수'를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 들어 정부의 재정건전성 강화가 주요 정책과제로 부각하자 앞으로 국채 발행 규모가 줄어들 것이란 얘기가 퍼지고,이 때문에 수요가 공급을 압도할 것이란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다.

◆자본시장 주도권 외국인에게 넘어가나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2004년 6월 말부터 2006년 3월 말까지 15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이 기간 미국 기준금리는 연 1.0%에서 연 4.75%로 높아졌다. 하지만 이 기간 10년만기 미 국채 수익률은 연 4.62%에서 연 4.85%로 0.23%포인트 오르는 데 그쳤다.

앨런 그리스펀 전 FRB 의장은 이런 현상에 대해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그린스펀의 수수께끼(conundrum)'라는 말도 이때 나왔다. 의문은 나중에 풀렸다. 미국경제가 호황을 나타내자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 자본이 미국 국채를 사기 위해 몰려들어 정책금리와 시장금리가 따로 논 것이다.

한국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채권시장뿐만이 아니다. 외환당국이 환율을 적정 수준으로 관리하려고 해도 외국인이 한국 채권을 사기 위해 계속해서 뭉칫돈을 들고 오는 이상 적절하게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중국이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 국채를 집중 매입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이런 분석까지는 아니지만 앞으로 한국 금융시장은 중국 당국의 정책 결정에 결정적으로 영향받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김일구 대우증권 채권분석부장은 "한은이 기준금리를 아무리 올려도 외국인이 채권을 사들여 금리가 떨어진다면 통화정책이 사실상 무력화되는 것"이라며 "앞으로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근본적으로 고민할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박준동/강지연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