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직업의 변화는 지난 40여년간의 한국 경제 성장과 궤적을 같이했다. 1970년대에는 섬유,가발 등 한국의 주력 수출제품과 밀접한 관련 직업이 인기였다. 주력산업군이 전기 · 전자,조선,건축 등으로 재편되자 선호 직업도 바뀌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인터넷 인프라를 이용한 다양한 직업군이 등장해 젊은이들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환경과 개성,웰빙 트렌드를 반영한 직업군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직업은 하나의 생명을 갖고 시대에 따라 명멸한다. 연말연시를 맞아 커리어면에서는 2주에 걸쳐 중흥기를 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직업들,그리고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직업군을 되짚어 본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물장수와 항법사

한국 '프리랜서'의 시초를 들자면 1900년대의 물장수라고 할 수 있다. 1908년 당시 서울에는 2000명의 물장수가 있었다. 서울 인구가 20여만명이던 점을 감안하면 인구 100명당 1명꼴로 존재한 셈이다. 물장수가 성업했던 이유는 당시 수질 악화로 음료로 부적합한 우물이 상당수였기 때문이다. 물은 삶의 필수요소였던 터라 물장수는 그야말로 '불황 없는 장사'였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 수도가 부설되면서 물장수는 사라지고 1980년대 이후에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후 새로운 형태의 물장수가 등장했다. 1980년대부터부터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생수'가 그것이다. 현재 전국 생수 판매업체는 80여곳에 달한다.

지금은 사라진 또 다른 대표적인 직업이 전차 운전사와 버스 안내양이다. 전차 운전사는 대한제국 말 서울에 처음으로 전차가 등장하면서 생겨났다. 1966년 전차 운행이 중단될 때까지 전차 운전사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전차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전차 수리공,조립공 등 관련 직업도 같이 없어졌다. 대신 1974년 지하철이 개통되면서 관련 직업군이 그 자리를 메웠다.

버스안내양은 1931년 서울에 유람버스가 생기면서 등장했다. 1961년 버스안내양 제도가 본격 도입되자 버스 회사들이 앞다퉈 버스안내양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일자리를 찾아 시골에서 상경한 아가씨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 1등 공신이 됐다. 1970년대 초중반에는 9급 공무원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이미지 개선을 위해 버스 개혁이 추진되면서 버스 안내양은 사라지게 됐다.

지상에서 버스 안내양이 사라졌다면 하늘에서는 항법사가 자취를 감췄다. 조종사와 함께 공중을 날며 기지국의 신호를 받아 비행 고도와 시간 등을 계산해주던 항법사는 상당한 고소득직으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무선통신 발달로 조종사가 기지국과의 직접 교신이 가능해지고,GPS 등 관성항법장치가 발달하면서 1980년대부터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교통 분야에서 사라진 직업은 이 밖에도 손수레꾼,마부,뗏목 조립공 등이 있다.

◆한국 수출을 이끈 억척여성 '미싱공'

1970년대에는 한국의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수많은 직업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들 직업 역시 지금은 여간해서는 보기 힘들다. 대표적인 직업이 미싱공과 방적공,가발제조원 등이다. 1970년대 60여만명의 여성이 경공업 부문에 종사했고 대부분이 이들 직업이었다.

특히 당시 미싱 분야의 재단사와 미싱사,시다(조수) 등은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도 수출 한국을 만들고 지금의 사회 주역을 길러낸 억척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남성들에게 결혼 선호 직업이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에 미싱 기술만 가지고 있어도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가발 산업 역시 크게 번창하면서 수많은 여성을 직업의 세계로 불러모았지만 지금은 중국 인도 등에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됐다.

사무,통신 분야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직업들이 많았다. 우선 전화교환원이 있다. 과거에는 전화기에 달린 핸들을 돌려 신호를 연결하면 교환원이 응답하고 고객의 요청에 따라 상대 가입자의 회선에 플러그를 연결시켜주었다. 이러한 방식의 공전식 전화기는 1980대까지도 존재했다. 하지만 자동식 전화기와 전자식 전화기가 확산되면서 교환원의 필요성은 점차 감소했다. 지금은 전화국 등에서 더 이상 교환원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 대신 전화의 발달은 이를 이용한 텔레마케터,고객상담원 등 새로운 직업을 탄생시켰다.

인쇄 부문에서도 다양한 직업이 있었다. 활자를 주조하는 활자주조공,인쇄용 원판을 만드는 데 필요한 활자를 골라내는 문선공,원고를 보면서 판을 짜는 식자공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신문사나 출판사가 CTS(컴퓨터 조판 시스템)를 도입하면서 실물 활자는 컴퓨터 화면상의 폰트로 바뀌고 활자 주조,문선,지형제작 등의 작업도 없어지게 됐다. 자연스레 이들 직업도 자취를 감췄다. 한때 사무실 한켠에 자리하던 타이피스트(타자원) 역시 지금은 컴퓨터가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없어졌다.

이 밖에 1970년대 활황기를 맞아 불타오르던 성냥제조원도 그 명맥이 끊기다시피했다. 지금은 전국에 남아 있는 성냥공장이 단 한 곳에 불과하다. 경북 의성에 위치한 성광 성냥공장이 그 주인공이다. 이곳 역시 1970년대 당시 월 매출이 6000만환,지금의 6억원에 해당될 정도로 성업했지만 지금은 7명만이 남아 성냥을 만들고 있다.

또 보릿고개 시절 문화적 욕구를 간접적으로 채워주던 영화간판 제작원도 과거의 직업이 됐다. 7~10일 정도의 작업을 통해 명배우들의 모습을 재연해내던 영화 화가들은 멀티플레스의 등장과 인쇄기술의 발달로 플렉스 간판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이 밖에도 연탄제조원, 굴뚝 청소원,숯 제조원,주산강사 등도 더 이상 그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도움말:한국고용정보원

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