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의 주택 200만호 건설 사업이 막바지로 치닫던 1991년 봄.

경기도 일산의 한 대규모 아파트단지 건설현장도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아파트 외벽 도색작업이 거의 완료되고 단지 내 화단에도 각종 조경수들이 속속 자리잡기 시작했다.

아파트 준공검사의 필수조건인 소방시설 설비업자들도 눈코뜰새 없이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각 층마다 설치되는 소화전에는 모직물로 짠 두터운 외피와 내부는 플라스틱 소재로 마감된 튼튼한 소방호스가 착착 채워져 나갔다.

소방호스를 실은 트럭은 그야말로 쉴새없이 아파트 건설공사 현장을 누비고 있었다. 현장 한 귀퉁이에서 이 모습을 동공 가득히 담고 면밀히 관찰하는 인물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현 신영자산운용 이상진(54) 부사장.

"바로 이것이다!"

코스닥 상장사인 소방기기 전문업체 '세진'(현 이스타코·학원사업 등으로 업종변경)을 분석해온 이 부사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 투자의 첫 출발은 기업탐방

한국경제신문의 온라인미디어 <한경닷컴>은 국내 현역 최고령 펀드매니저인 이상진 부사장을 찾아 직격 인터뷰를 했다. 이 부사장은 1978년 현대중공업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87년 신영증권으로 옮겨 영업을 하다 영국계 슈로더증권을 잠시 거쳐 1996년부터 신영운용의 주식운용을 총괄했다.


신영운용 설립 때부터 생사고락을 같이 해 온 허남권 상무에게 지난해 CIO(최고투자책임자) 직함을 넘겨주고 지금은 젊은 펀드매니저들의 멘토(mentor) 역할을 하며 암묵지(暗默知)를 전수하고 있다.

영국의 전설적인 펀드매니저 앤서니 볼턴(Bolton·59)이 28년 간 연평균 19.5%의 경이적인 수익률을 기록하며 시장에 맞서 승리했던 것처럼 이 부사장도 신영자산운용을 설립한 뒤 13년 간 시장에 단 한번도 굴복하지 않았다.

2002년 4월 만들어 신영운용의 간판 펀드로 자리매김한 신영 마라톤펀드의 경우 현재까지 매년 시장수익률을 웃돌고 있다.

이 부사장은 미국의 투자 귀재 '피터 린치'(Peter lynch·65)가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그 핵심은 '성실함'이다. 수 십년 간 펀드매니저로 일하면서 여름휴가를 딱 한번 떠났다. 한 번의 휴가조차도 휴양지에 있는 기업탐방이 목적이었던 피터 린치의 끈질긴 승부근성을 본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업의 펀더멘털과 내재가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실히 발품을 팔아 현장을 찾는 방법밖에 없다는 지론에도 변함이 없다.

신영운용은 지금도 1년에 300여개의 기업을 탐방하고 있다. 정문 수위의 태도만 봐도 그 회사 상태가 어느정도 인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

"수위 복장이나 근무태도를 보면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 지 단박에 알수 있습니다. 특히 직원들과 1시간만 대화해 보면 그 회사의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 핵심은 바로 '자신감'입니다"

이 부사장은 결국 어떤 기업이 잘 되느냐 못 되느냐는 그 절반이 '휴먼 캐피털'(인적 자본)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고 있다.

또 투자대상 기업이 정해지면 먹잇감이 배불리 풀을 뜯고 발걸음이 무거워 도망치지 못할 때까지 한나절 이상 매복해 기다릴 줄 아는 대평온의 늑대처럼 끈질긴 면도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업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시시각각 때깔이 바뀝니다. 그래서 한 기업을 일년에 두세번씩 방문합니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불황인지 호황인지는 야적장에 쌓여있는 후판(배를 만들때 사용하는 철판)이 얼마나 있는지를 보면 압니다. 호황기에 가보면 잘라놓은 철판을 주체할 수 없어 주차장이나 심지어는 사내 운동장에까지 쌓아놓고 일을 합니다. 회사를 자주 출입하면 바보가 아닌 이상 바로 알 수 있죠."

기업을 정확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병법도 동원된다. 소방기기업체 세진을 발굴해 큰 수익을 얻을 때도 '적의 적을 이용하라'는 병법이 활용됐다.

"투자대상 기업이 정해지면 경쟁업체부터 샅샅이 훑습니다. 세진의 경우도 경쟁사 대리점을 먼저 찾아갔습니다. 그 대리점 사장이 '세진은 신축 아파트가 많아 물량이 달리자 현금 아니면 제품을 안준다'며 비난했죠.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할 정도면 호황이라는 판단 아래 이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아파트 건설현장을 찾아갔던 겁니다"

트렌드를 읽는 능력도 중요하다. 그래서 성공한 기업이 'E1'이다.

"운용사를 설립하고 많은 기업을 다녔지만 액화석유가스(LPG) 공급업체 E1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우선 가스는 음식과 달리 상하지도 않습니다. 도시가스 같이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배관도 필요하지 않아 시설투자에 자금을 안들여도 됩니다. 게다가 현금만 받습니다. LPG 승합차가 막 보급되기 시작해 수요도 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에너지원이 나오지 않는 한 청정에너지라는 장점으로 장수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확신했습니다. 2만원하던 주식이 7∼8년 사이에 최고 16만원까지 치솟더군요"

물론 실패한 경험도 있다.

"운송, 항만하역 등 운송보관업체 KCTC는 기업가치를 알면서도 투자를 못했습니다. 당시 자본금이 20억원밖에 안되는 소형주였는데 거래가 없어 기관투자가들이 손을 댈 수 없었어요. 호기심에 탐방을 시도했는데 회사에서는 '주가에 관심없다'며 거부해 버렸죠. 그 회사는 무상증자를 결정한 이후 6년여 동안 20배 가까이 올랐습니다"

GDP, 금리, 환율, 유가와 비교하라


투자대상 기업의 내재가치를 현장에서 확인했다면 다음은 현재 상황을 검검해 봐야 한다.

이 부사장은 GDP(국내총생산)와 금리, 환율, 유가 등 네가지 요소와 기업의 실적을 대조해 보면 포트폴리오에 담아야 할 시점인지 아닌지를 금세 알수 있다고 말했다.

"GDP와 금리, 환율, 유가 이 네가지가 가장 중요한 변수입니다. 대상 기업의 트렌드와 미래를 읽어낼 수 있기때문이죠. 이 네가지 지표를 역사적인 순서로 열거해 놓고 분석기업의 실적과 대조해 보면 각 변수와의 상관관계가 나옵니다. 금리에 민감한 지 아니면 환율과 유가에 예민한 기업인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GDP 성장률이 가장 중요한 변수입니다. 방향성을 체크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부사장의 또다른 철칙은 '펀드매니저가 이해할 수 없는 종목은 사지 않는다'이다. 새로운 기술을 접목해 제아무리 성장성이 돋보인다 해도 투자가가 그 기술을 이해할 수 없다면 실패확률이 높기때문이라는 얘기다.

개인투자자들에게는 기업의 내공인 업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업명'에 신경쓰라고 조언했다.

"가치투자를 지향하는 자산운용사들이 코스닥시장에 관심을 기울지 않는 것은 업체들이 대부분 설립된지 10여년이 채 안 됐기 때문입니다. 읽기도 어렵고 다른 기업과 구별도 안 되는 그럴싸한 영문 이름을 가진 업체들은 무조건 경계대상입니다. 촌스럽지만 순수 한글이나 한자로 된 이름을 가진 업체를 펀드에 편입해 재미를 본적도 많습니다. 그만큼 오랜 업력을 가진 기업에 투자할수록 실패 확률이 낮아진다는 것이지요"

내년 증시 조정기 대비해야

이 부사장은 최근 조정기를 거치고 있는 증시에 대해 그다지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지 않았다. 올해 단기급등하며 소진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일정정도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러한 시장 상황을 염두에 두고 수출주 보다는 내수주에 치중할 것을 주문했다.

"지난 24년간의 증시 통계를 살펴보면 매우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됩니다. 1980년대나 1990년대는 증시가 몇 년간 꾸준한 방향성을 갖고 움직였습니다. 묘하게도 홀수 해에 증시가 좋고 짝수 해에 부진했습니다. 특히 올해는 저점과 고점을 기준으로 하면 61%나 폭등했습니다. 증시도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할 때까지 일정 수준을 다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올해 삼성전자와 LG화학의 경우 100% 이상 올랐는데 다음해에 또 그만큼의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상승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중소형주에 눈길을 돌리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라고 못박았다. 최근 상승세는 대형주가 침체기에 진입한 사이 키맞추기 정도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에서다.

"개별 중소형주 투자는 참아야 하는 구간이고 대안으로 생필품 관련 종목의 내수주를 공략해 볼 때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정부가 북한에 '그랜드 바겐'을 제안했습니다. 북한 리스크가 사라질 수 있다는 가정 하에 투자목록을 재정비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魔)의 지점'을 견뎌라

마라톤에서는 흔히 35km 구간을 '마의 지점'(데드포인트·Dead point)이라고 표현한다. 이 때가 가장 고통스럽다고 한다. 펀드투자에서도 마찬가지다.

"투자자들이 기다려주지 않고 무리지어 행동할 때 운용의 보람을 느끼지 못할 뿐더러 사실 괴롭습니다. 투자의 손실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은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수록 낮은 가격에 원하는 수량을 매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세는 항상 옳지 않기 때문에 시간과의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 됩니다. 펀드운용의 성과는 이러한 투자결정의 누적적인 결실인 겁니다"

이 부사장은 "야구로 치면 3할대 타자 정도면 성공한 것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3년에 100% 수익률이 목표이기도 하다.

"제아무리 베테랑 펀드매니저라도 10개 종목을 고르면 3개 종목은 안타를 치고, 4개 정도는 시장수익률 정도, 나머지 3개 종목은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안타치는 3개 종목으로 부족한 3개 종목을 보충해 시장수익률 이상을 노리는 것이지요. 엄격히 말하면 3할대 이상을 노리는 타자와 같습니다"

이 부사장은 신영운용의 간판 펀드인 밸류고배당이나 마라톤펀드도 잘 될때도 있고 좋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선택한 종목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시간은 우리편'이라는 믿음으로 기다린다고 했다. 물론 스트레스와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도 빠뜨리지 않았다.

창조적 펀드매니저가 되라


신종플루로 전국민이 손씻기를 철저히 하면 안과 매출이 떨어질 것이란 점까지 추론해야 할 정도로 펀드매니저는 창의성이 절대 필요한 직업이다.

이 부사장은 "시장에서 웬만한 기업은 모조리 연구되고 있다고 보면 되고 새로운 종목을 발굴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따라서 후배들에게는 숫자에 치중하지 말고 스토리텔링에 의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정기업의 미래를 상상해 보는 콘텐츠 개발에 더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운용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와 문학, 철학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요. 또 숫자를 보려면 10년치 기업의 재무제표를 샅샅이 뒤지는 성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10억원으로 시작한 마라톤펀드 규모가 5년 사이 수 천억원대로 커졌을 때 운용을 담당했던 후배 원주형 펀드매니저가 성장통을 겪었다.

"마라톤펀드의 산파역을 맡았던 원 팀장이 운용 규모가 커지자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시작했어요. 급기야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나섰지요. 알토란 같은 고객돈을 까먹고 싶지 않다는 거였어요. 극구 말려 6개월 안식휴가를 다녀오게 했더니 지금은 능력발휘를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 운용본부장을 맡고 있는 허 상무는 실제 신영운용의 명성을 쌓은 주인공이기도 하고요"

이 부사장은 후배들에게 자신의 공을 돌리는 '겸양의 덕'도 잊지 않았다.

'은퇴 시점이 언제정도가 될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펀드매니저의 길을 접게 된다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조용히 중국 고전을 번역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한경닷컴 변관열 기자 bky@hankyung.com
사진=한경닷컴 양지웅 기자 yangd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