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경제와 금융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복잡해지고 있다. 그런데 일방적이고 명확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와 금융시장의 역사적 흐름(예를 들자면 금융제도의 진화과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할 수 있다.

오랫동안 같이 살아온 남편이나 아내에게서 특정한 언행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 밑에 깔린 의도를 금새 알아챈다. 반면 잘 모르는 사람과의 이해 전달은 아무리 긴 설명이 동반되더라도 충분치 못한 경우가 많다.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에 뿌려진 씨앗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특정한 시기에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많은 현상들을 조화롭게 설명해줄 수 있는 (연속성을 지닌) 현상의 ‘줄거리’를 이해해야 한다.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시장에 참여하는 것은 마치 적의 그림자에 주먹질을 하는 것과 같다.

요점을 이야기하자면 현 금융위기의 근원은 실물경제에 비하여 비대하게 커진 금융시장이다. 그리고 금융시장의 팽창은 (가장 중요하게는) 파생상품 확대에 근거한다. 전 세계의 총 생산 능력과 266개 국가의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통화 규모는 세계 경제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한다.

현재 전 세계에는 명목금액상 총 생산(GDP)의 10배를 뛰어넘는 파생상품 거래가 맺어져 있다(참조: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www. bis.org). 오늘날의 경제는 설사 실물 부문에서 생산활동과 소비가 위축되어도 금융 부문에서 유동성의 활동이 유지되면, 즉 유동성이 팽창하거나 통화 속도가 증가하면 자산 가격은 상승하는 기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파생상품 거래는 시간과 환경이 무르익게 되면 ‘저절로’ 현금유동성으로 둔갑하기 때문에 총 유동성 확대를 부추긴다. 한마디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고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파생상품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상품이다. 무엇인가에서 파생(to derive)되었다는 것이 상품 명칭(derivative) 안에 함의되어있듯이, 파생상품은 그저 기초자산의 그림자일 뿐이다. 하지만 실체가 없는 시장이 이토록 커질 수 있는 이유는 두툼한 지갑을 지닌 자본가들이 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급작스러운 일로 가득한 21세기 사회에서 ‘만기’의 개념이 없는 주식을 사고 파는 것은 본질적으로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그리고 투자가들이 포지션(보유주식)을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에게 되파는 것이다. 따라서 투자가는 보유자산에 대한 분석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투자가들의 기대값과 구매력(매수 여력)에 대한 눈치싸움을 해야 한다. 적절한 가격과 시기가 도래했을 때 팔고(사고) 싶어도 살(팔) 사람이 없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명목상 시장의 깊이를 더해주는 이유로 파생상품 시장은 본질적으로 ‘큰 손’을 위한 시스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기꺼이 받아주는 (‘꿈’을 먹는) 수많은 소액투자가들이 있기에, 시장은 형성된다.

파생상품은 오로지 변동성이라는 환경조건에서만 (일시적이나마)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금액 면에서) 5대5의 비율로 서로 반대편에 서 있지만, 파생상품 거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변동성을 원한다. 양쪽 모두 이길 자신이 있기에 거래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생상품 거래의 확대는 언젠가는 시장 변동성 확대로 전이된다. 그리고 변동성이 확대될수록 더 많은 헤지 수요와 투기 수요가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시간과 환경이 무르익게 되면 파생상품 거래가 ‘자연적인’ 총 유동성 확대로 연결되는 과정이다. 경제 시스템에서 창출된 총 유동성에서 ‘생산성 향상과 이익 증가에 근거한 유동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해를 거듭할수록 계속 떨어지고 있다 (그림 참조). 돈이 풀려도 실질적인 경제 활동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 보자. 경제시스템에서 통화유통 속도가 상승한다는 것은 경제자본 단위당 생산이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동성 증가는 보통 (당연히) 자산가격 증가를 낳는데 이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높아진 자산가격이 향후에도 유지되기 위해서는 유동성이 가치 창출로 연결되는 순환 효과가 확인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높아진 가격은 유지되지 못하고 결국에는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유동성 증가와 동시에 자산가격이 폭등했던 현상의 배후에는 경제자본 단위당 생산 증가에 따른 가치 창출 효과가 있었다(2000년대 초반 이전의 불황기인 1990년대 초에도 동일한 현상이 목격된다).

반면 2007년에 들어오면서 주가 상승이 유지되지 못하고 거꾸러졌던 이유는 자산가격 상승을 뒷받침하는 실제가치 창출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근의 모습은 어떠한가? 유동성은 지속적으로 공급되고 있지만 높아진 자산가격을 담보하는 가치 창출로 연결되는 순환 효과의 모습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불황과 비교할 수 있는 90년대 초나 2000년대 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단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느린 통화유통 속도는 낮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조만간 금리 인상이 있을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과는 다르게 미 연준리의 금리 인상 압력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주가의 측면에서 볼 때, 단기적인 예상 시나리오와 중기적 예상 시나리오가 상충하는 상황이다. 이것(흔한 충돌 상황)은 복잡성의 특질이기도 하다.

단백질과 영양소는 전제조건이 충족되면 근육(실물 경제가치)을 강화한다. 반면 스테로이드(Steroid)는 몸이 회복되는 속도를 빠르게 하는 일시적 효과를 가져올 뿐이다. 위의 그림은 최근 창출되고 있는 유동성이 영양소보다는 스테로이드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스테로이드에 의지해 높은 기록(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선수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스테로이드에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지속적인 스테로이드 복용은 결국은 치명적인 결과를 부른다.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스테로이드를 중단한다면? 원래 실력이 들통난다. 따라서 결과는 이렇든 저렇든 그리 좋지 못하다.

오늘날 붐을 이루고 있는 파생상품은 바로 불완전한 시대상황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아쉽게도 전 세계에서 최다 거래를 보이는 한국의 선물/옵션 시장의 본질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시장의 파생상품 거래 규모 확대를 제시하며 금융시장의 선진화를 언급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식시장의 변동성 상승 압력이 높아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이 현상은 사실상 그리 자랑스러워 할 일도, 환영할 일도 아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환율은 고정되어 있었으며, 유가의 변동 범위는 소폭에 지나지 않았고, 전체적인 물가 변동 폭도 대체로 일정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그때까지 안정적으로 여겨졌던 분야에서 리스크가 출현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와서는 거의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 통제 불능 현상의 배후에는 설명 가능한 역사적 사건들이 있다(참조: 「오메가 포인트 경제학」, 팜파스, 2009, p177~211). 이 사건들의 연결고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중장기 투자전략을 세우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특정한 경제 흐름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서, 앞으로도 계속 심화될 것이다. 시장의 변동성 확대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어제는 너무나도 친절하고 상냥했던 당신의 배우자, 애인, 또는 상사가 오늘은 갑자기 뜬금없이 냉랭한 모습을 보인다고 상상해보자.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주기와 정도가 점점 더 심화된다면? 당신은 오리무중을 거듭하다가 결국 이성을 잃게 될 것이다. 자산관리(또는 투자 결정)에서 순간이나마 이성을 잃고 기분 흐르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

미래의 변동성 확대에 대비한 선진 운용 기법을 도입하든지, 아니면 예상 변동성 범위를 확대하여 (놀라지 말고) 감내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물론 최선의 길은 전자의 방법이다. 다음 번에는 개별 기업에 대한 글을 쓸 계획이지만 개별 기업을 보기 전에 큰 그림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높은 기술력과 경쟁력을 지닌 기업이라도 경제의 큰 흐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비가 내릴 때 더 맞고 덜 맞고의 차이는 있지만, 젖지 않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2007~2008년에 우수한 펀더멘털에도 불구하고 키코 사태에 의해 한때 기업가치가 반의 반 토막이 났었던 기업들이 좋은 예이다. 향후 수년간 간헐적으로 반복될 변동성 확대에 전략적으로 대비하는 것, 즉 상황의 전조를 감지하는 레이더가 필요하다.

<에셋플러스자산운용 글로벌운용 담당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