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유동성이란 한국은행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은행이 돈을 풀면 그만큼 시장에 있는 채권이 한국은행으로 회수되기 때문입니다. 현금뿐만 아니라 유가증권도 시중유동성에 포함되기 때문에 한국은행이 하는 일은 시중유동성의 구성 비중을 바꿀 뿐입니다.

이에 비해 정부가 돈을 푸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신규 자금이 풀리는 만큼 시장의 유동성이 늘어나게 됩니다. 시장에서 국채를 발행하더라도 그 돈은 다시 재정 지출로 투입되기 때문에 국고채 신규 발행분은 유동성 증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28조4000억원 규모의 슈퍼 추경예산이 지난달 말 임시국회에서 통과됐습니다. 이달부터 추경 자금이 본격적으로 풀립니다. 한국은행의 저금리 정책에서 비롯된 유동성 장세는 이제부터 정부발(發) 유동성 장세로 바통을 넘겨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국은행의 저금리 정책이 은행 금고에 머물러 있는 돈을 주식시장이나 회사채 시장으로 밀어내는 '머니 무브'효과를 만들어냈다면,슈퍼 추경은 금리를 그대로 놔둔 채 물가 상승을 유발하는 쪽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전쟁 재원을 마련하느라 돈을 마구 찍어냈던 1930년대 말 독일이나 만성적인 재정난에 허덕였던 1980년대 남미 국가들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이번 슈퍼 추경은 규모가 과다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슈퍼 추경은 고용 창출과 내수 부양을 위한 조치이기도 합니다.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디플레(물가 하락) 압력이 강하기 때문에 물가 불안이 당장 현실화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자산 포트폴리오를 짤 때는 인플레이션 발생 가능성을 예전보다 조금 더 고려하는 전략이 필요해 보입니다. 주식이나 부동산 등 전통적인 실물형 자산뿐만 아니라 물가연동형 채권,원자재 등 실물펀드,리츠 등도 투자 검토 리스트에 올려놓을 만합니다. 최근의 국내 경기 흐름이 바닥을 탈출하지 못하고 '경기 불황 속의 물가 상승(스태그플레이션)'으로 흘러갈 가능성에 대비하는 차원에서도 이 같은 전략이 괜찮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