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가능한 자금이 100조원이나 된다고 한다. 금고를 열어달라."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의 이 같은 발언으로 시작된 정치권과 정부의 재계에 대한 투자 촉구를 어떻게 봐야 하나.

모험적인 기업가들의 미래를 위한 투자는 필요하지만 자금 사정만으로 보면 간단치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경제신문과 현대경제연구원이 공동으로 실시한 투자여력 조사 결과가 이 같은 현실을 말해준다.

◆대기업도 단기 차입에 의존

상장된 제조업체 중 매출액이 큰 순서로 30대 기업의 금융권 차입금은 2007년 말 16조7804억원에서 2008년 말 28조8517억원으로 12조713억원(71.9%) 늘었다. 이 가운데 장기 차입금은 7조380억원에서 10조6999억원으로 3조6619억원 증가했으며 단기 차입금은 9조7424억원에서 18조1518억원으로 8조4094억원 늘었다.

제품을 만들어도 예전만큼 팔리지 않고(재고 자산 증가),제품을 팔아도 예전보다 외상 판매가 늘어서(매출채권 증가) 부족해진 운전자금을 차입금을 늘려 메우고 있는 것이다.

눈여겨 볼 대목은 단기 차입금의 증가 속도(86.3%)가 장기 차입금 증가 속도(52.0%)보다 훨씬 높다는 점이다. 자금의 만기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단기 차입금을 더 늘리는 측면도 있지만 이보다는 은행 등 금융권이 금융 불안 때문에 자금을 장기로 대출해 주지 않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30대 기업 가운데 좀 더 우량한 10대 기업도 자금 사정은 마찬가지다. 1년간 장기 차입금은 1조4850억원에서 3조3849억원으로 127.9% 늘었고 단기 차입금은 4조2956억원에서 9조1566억원으로 113.2% 증가했다.

◆단기 채무 상환 능력 약화

기업의 재무안정성을 살펴보는 대표적인 척도가 유동비율이다. 1년 내에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자산을 1년 내에 갚아야 하는 유동부채로 나눈 것이다. 100%가 넘는다면 금융권의 차입금 상환 요구에 대응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 비율이 높을수록 재무상태가 건강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지난해 말 현재 30대 기업의 유동비율은 123.1%로 기준점인 100%를 웃돌고 있어 문제는 전혀 없다. 다만 1년 전엔 125.2%였으나 1년 새 2.1%포인트 낮아졌다. 단기 차입이 크게 늘어난 탓이다. 10대 기업의 경우엔 하락폭이 더 컸다. 2007년 말엔 유동비율이 144.5%였으나 지난해 말 137.6%로 6.9%포인트나 하락했다.

◆장기 채무로 전환돼야 투자여력 높아져

정치권에서 현금성 자산을 이유로 기업에 투자 확대를 요구하고 있지만 재계에선 이에 앞서 만기 연장을 호소하고 있다. 바로 차입금이 급증하고 있어서다.

30대 기업의 경우 작년 말 40조7000억원의 현금성 자산을 두고 있지만 운전자금이 47조원에 이르고 더군다나 차입금이 29조원에 육박하고 있어 실제 투자를 늘리기엔 어려움이 많다. 현금성 자산이 곧바로 '노는 돈(idle money)'은 아닌 것이다. 정부와 금융권이 대기업에 대해서도 차입금의 만기를 연장해준다면 현금성 자산 중 적지 않은 자산을 투자로 돌릴 여유가 생기게 된다.

차입금을 단기 위주에서 장기 위주로 바꾸는 것도 기업의 투자 확대에 큰 보탬이 된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상무는 "단기 차입금은 은행이 언제 상환을 요청할지 알 수 없는 돈인데 이를 갖고 기업이 투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기본적으로 결실을 얻는 데 몇 년씩 걸리는 투자를 늘리려면 차입금의 장기 전환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유 상무는 "기업이 장기 발전을 위해 연구 · 개발(R&D) 투자를 확대할 경우 정부가 세액공제를 늘려주거나 R&D 인력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면 기업의 투자 의욕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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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증권시장 제조업 상장사 가운데 매출액 기준 상위 30개 기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