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13일 한 개인투자자가 코스닥기업 유진데이타 지분 5.47%를 신규 취득했다고 공시했다. 취득 목적은 경영참여. 장중에 나온 이 공시에 유진데이타 주가가 들썩였다.

큰손이 경영참여 목적으로 5% 이상 지분 취득 공시를 냈을 때 해당주 주가가 출렁이는 것은 낯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날 시장의 관심은 큰손의 ‘직업’에 쏠렸다. 바로 ‘성형외과 의사’였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서울 청담동 예성형그룹 대표 원장인 정성일씨(48)다. 정 원장은 공시를 한 이후에도 유진데이타를 계속 사들였다.부인과 공동보유자 1인 지분까지 포함해 유진데이타 지분 14.75%(2월 23일 현재)를 보유, 이 회사의 2대주주가 됐다.

◆ 의사는 왜 유진데이타에 관심을 보였나?

1995년 개원 후 줄곧 성형외과를 경영해 온 정 원장이 유진데이타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꼽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여러 병원을 하나의 브랜드로 묶는 병원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서 유진데이타같은 시스템통합(SI)업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병원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를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 개발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시스템통합(SI)업체를 찾던 중 유진데이타를 알게 됐지요.”

또 다른 이유로는 의료분야가 점차 산업화, 비즈니스화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증권시장에서 직접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상장기업을 갖고 있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는 점을 들었다.

“병원 사업은 아직까지 면허를 갖고 있는 의사만 할 수 있어요. 개인 자본이니 영세한 곳이 많죠. 앞으로 영리법인이 허용되면 본격적으로 산업자본이 들어와 덩치가 커질 텐데, 미리 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장사를 인수 및 합병(M&A)하려는 목적은 인수 후 되팔아 차익을 얻거나, 아니면 제대로 경영해 회사를 잘 키우는 것이다. 정 원장은 자신의 M&A 목적은 후자라고 설명한다.

“유진데이타는 이렇다 할 성장동력이 없어 보여 활기를 잃은 상태인 데다 최대주주 지분율도 높지 않았죠. 그래서 회사에 영향력을 미칠 만한 규모의 지분을 취득한 뒤 양쪽이 시너지효과를 낼 만한 사업 협력안을 제안하자는 생각으로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어요.”

◆ 실패로 끝난 표대결…반토막 난 주가

그러나 이것은 ‘M&A 초보’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뜻밖에도 기존 최대주주인 김중찬 대표이사 측의 거부반응이 강했던 것이다. 최대주주는 정 원장의 제안에 별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유상증자를 단행해 정 원장의 지분율이 줄어들게 만드는 '반격'을 하기도 했다.

정 원장도 이에 질세라 지분율을 계속 높여나갔다. 자신의 뜻을 대변할 이사진 선임과 정관 변경도 필요하다는 판단에 임시주주총회 소집을 요구했다. 뜻을 같이 하는 소액주주들과 힘을 모아 공동보유 신고로 지분을 추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지난해 12월4일에 열린 임시주총에서 정 원장의 이사 선임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최대주주 측의 숨은 우호지분에 허를 찔렸기 때문이다.

“내 지분과 소액주주 등을 합해서 40만주 정도를 모아서 집중투표를 하면 대주주 및 우호지분을 감안해도 주총에서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임시주총에서 집중투표제를 실시하자고 제안했구요. 그런데 대주주가 주총 현장에서 집중투표제를 할 것인지 여부를 정하자고 하더군요. 해서 표결에 붙였는데, 반대표가 더 많이 나오더라구요.”

집중투표제란 기업이 2인 이상 이사를 선출할 때, 3%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주주가 주주총회에서 투표를 요청하면 이를 실시하여 득표를 많이 한 순서대로 이사를 선출하는 제도다. 보통 주총에서는 지분이 많은 대주주가 추천하는 이사들이 선임된다. 그러나 집중투표제에서는 소액주주도 이사선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소액주주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제도로 알려져 있다.

유진데이타의 주가는 임시주총에서 공격자인 정 원장 측이 패배한 이후 다소 맥을 못추고 있다. 지난해 3월초 정 원장이 지분 취득 공시를 낼 무렵만 해도 최고 2050원까지 갔었지만, 22일 종가는 1090원에 그친 상태다.

지금까지 그가 유진데이타 지분을 매입하는데 투입한 자금은 10억여 원 가량이다. 평균매입가격이 주당 1100원 정도로, 전일 종가 1090원을 감안하면 대단한 차익을 낼 분위기는 아니다. 하지만 주식 매매에 따른 차익보다 사업적인 시너지 효과를 기대한 투자 판단이었던 만큼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2007년부터 조금씩 유진데이타 지분 매입을 시작할 때는 M&A로 인한 문제로 이렇게 애를 먹을 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최대주주와 적대적으로 대립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구요.”

그러나 그는 2년 가량 붙잡고 있던 유진데이타 문제로 속이 탄 적도 많지만,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이 많았다며 웃었다.

정 원장은 현재 유진데이타 건에 대해 장고(長考)에 들어간 상태다.

“저랑 싸우다 지쳤는지 유진데이타 최대주주는 보유지분을 매각할 생각이라네요. 저를 포함해 매수자를 찾고 있지요. 저는 이 지분을 인수할 지 여부를 고민하는 중이고요.”

지난해 말 시중에 자금이 돌지 않는 신용경색 사태가 일어난 후 M&A 자금을 마련하기가 만만하지 않은 터다. 이 때문에 정 원장은 요모조모 따져보는 참이다.

"자금조달도 그렇고, 지분인수 후 일정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주총회가 열리기 전인 2월중에는 결단을 내릴 생각입니다"

◆ 용감한 의사, 상장사 M&A에 도전한 까닭은?

아무리 병원경영 차원에서 SI업체가 필요했다고 해도, ‘의사선생님’이 M&A라는 비즈니스상의 결정을 과감히 내렸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재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 원장을 만나서 얘기를 해보면 이 같은 호기심은 금새 해소된다. 그는 묵묵히 진료만 하는 전형적인 ‘의사선생님’ 타입과는 거리가 멀다. 외모도 튄다. 한쪽 귀를 뚫어 귀걸이를 하고 있는 그는 남성잡지에 소개됐을 만큼 세련된 인물.

그러나 그의 진짜 튀는 점은 외모가 아니다. 평범한 의사가 아닌 ‘의료사업가’로서 그간 걸어온 발자취야말로 그의 독특한 점이다.

정 원장의 남다른 행보는 95년 전문의를 딴 후 개원 때부터 시작된다. 당시 성형외과에 메카였던 서울 명동에 이름 없는 젊은 의사가 겁 없이 개원하며 고참 선배들에게 도전장을 냈던 것이다.

그는 원래 의사보다 사업가가 꿈이었다. 의사였던 부친 뜻에 따라 의대에 갔는데, 그때도 의료 분야 역시 사업거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진학했다고.

신참이면서 실력자들이 진검승부를 벌이던 ‘성형의 메카’ 명동에 개원한 그는 동시에 회원제 레스토랑도 함께 열어 두 가지 사업을 진행했다. 확실히 시작부터가 여느 의사와는 확연히 달랐다.

2년여 후에는 사업을 더 키웠다. 후배와 함께 ‘탑성형외과’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서울 청담동의 한 건물을 300평이나 임대했다. 그곳에 성형외과, 미용실, 웨딩서비스 등 미용 유관 분야를 모은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

한창 오픈 준비중이던 97년 말에 외환위기가 터지며 마음고생도 많았다고. 그러나 어렵게 오픈한 후 다행히 영업이 잘 되어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부천, 명동 등에 탑성형외과 네트워크를 확장하며 덩치를 키웠다.

◆ 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업가의 꿈

2003년에 그는 강북의 대표적인 고급 업무빌딩인 광화문 파이낸스센터 빌딩을 무대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정 원장은 이 비싼 건물 2층에 무려 780평이나 되는 공간을 임대했다. 이번에는 성형외과, 안과, 치과 등 미용 관련 클리닉의 강자들을 모아 SFC라는 ‘메디칼 몰’을 연 것. 한 건물에 여러 의료서비스를 모은 이 같은 모습은 지금은 종종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생소한 것이었다.

그는 SFC 사업을 진행하는 한편으로, 해외진출에도 눈을 돌렸다. 2003년에 SK그룹과 몇몇 병원들이 국내 최초로 중국 베이징에 합작 진출한 SK애강병원 사례가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그는 SK애강병원장을 맡아 직접 베이징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가서 보니 중국에서는 병원들이 이미 2002년부터 영리법인화 되어 있었어요. 언젠가 국내에서도 이런 시기가 오겠구나, 대비해야겠다, 생각했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경험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탑성형외과로 상승세를 탔던 그는 SFC 사업과 중국진출에서는 쓴맛을 봐야 했다.

2년여 만에 정리한 SFC 사업은 수십억의 손실을 냈다. 법적으로 병원은 지주회사 체제처럼 한 법인이 여러 의료기관을 지배할 수 없다. 컨트롤 타워가 없다 보니 운영이 쉽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고심 끝에 사업 철수를 결정했는데, 임대료도 높고 병원 시설 투자비가 만만치 않았던 탓에 손실 규모가 컸다고 한다.

SK애강병원의 경우 의료진과 대기업 간에 운영상 의견차가 있어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해 정 원장은 SK애강병원에 출자했던 지분을 모두 정리했다.

베이징 생활 후 귀국한 정 원장은 그가 없는 동안 다소 주춤했던 성형외과 사업을 재정비했다. 그의 브랜드 ‘탑성형외과’ 대신, 치과 브랜드로 잘 알려진 예치과와 손을 잡았다. 그렇게 출범한 것이 5명의 성형외과 전문의가 뭉친 현재의 ‘예성형그룹’으로, 오는 3월이면 1주년을 맞는다.

이처럼 평범한 ‘의사’로서만이 아니라 ‘사업가’로 달려온 그였기에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때는 상장사 M&A에도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의대를 졸업한 의사의 80% 정도는 개원을 하죠. 의사니까 진료도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의대 졸업생들이 대부분 개인사업자가 된다는 얘기인거죠. 의대에서도 경영과 비즈니스에 대해 가르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역시 ‘의료경영 전문가’다운 생각이다. 의료사업으로 단련된 그의 경영수완이 슈퍼개미로서 코스닥 기업에 대한 M&A 성공으로 이어질 지 주목된다.

한경닷컴 이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