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증시는 글로벌 경기침체와 맞물려 변동성이 커지는 양상이다. 주가는 거의 하루 오르고 하루 떨어질 정도여서 방향성을 잡기 어려운 상황이다. 시시때때로 세계적인 기업들의 도산과 금융위기 재연 우려가 불거져 투자자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에 한국경제신문은 과거 월스트리트를 주름잡았던 전설적인 투자 고수들의 삶과 투자철학을 되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혹독한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이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통해 지금의 불황을 타개할 수 있는 교훈을 얻어 보려는 의도에서다. '가치투자의 아버지.시대를 초월한 가장 위대한 투자자.워런 버핏의 스승' 벤자민 그레이엄에게 붙는 수식어는 수도 없이 많다. 그가 현대 증시역사에 남긴 업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레이엄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투기의 대상으로 치부됐던 주식을 과학적 분석과 투자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주식투자를 학문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유명한 '증권분석'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이 책에서 그는 주가수익비율(PER),부채비율,장부가치,순이익증가율 등을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그의 제자인 버핏이 "증권분석을 10번 이상 읽지 않고는 절대 주식투자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할 만큼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1940년 개정판에서 추천한 종목은 이후 8년간 250% 이상 상승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투자는 철저한 분석에 기초해 원금의 안전성과 만족할 만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운용"이라며 "이 요건에 부합하지 않은 운용은 투기"라고 정의했다. 과연 2009년 한국의 투자자들은 이런 원칙에 입각해 투자해왔는지 되돌아 볼만한 대목이다.

그레이엄 투자철학의 진수는 '안전마진(safety margin)'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된다. 이상건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 이사는 "안전마진이라는 개념은 지금도 투자업계의 금과옥조로 남아있다"고 평가했다. 안전마진은 그의 다른 투자규칙에서 잘 설명돼 있다. 그는 "투자의 제1원칙은 돈을 잃지 않는 것이며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돈을 잃지 않는다는 원칙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주식을 비싸지 않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레이엄이 어떤 주식을 통해 안전마진을 확보하려고 했는지는 실제 투자사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레이엄이 1923년 투자회사 '그레이엄 코퍼레이션'을 설립한 후 처음 거래한 종목은 듀폰과 제너럴모터스(GM)였다. 당시 듀폰은 GM 주식을 상당량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듀폰의 시가총액은 GM 주식가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듀폰 주식을 매수하고 고평가된 GM 주식을 공매도했다. 그레이엄은 회고록에서 "시장은 듀폰의 화학사업과 자산에 대해 적정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투자는 예상했던 수익을 남기고 끝났다.

또 하나의 사례는 '노던파이프라인 전투'로 불리는 사건이었다. 노던파이프라인은 1911년 스탠더드오일 독점체계가 와해되면서 독립한 송유관 회사였다. 어느날 철도회사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하던 그레이엄은 우연히 노던파이프라인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주당 65달러에 거래되고 있는 회사가 막대한 철도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 채권의 가치만도 주당 95달러에 이르고 매년 6달러의 배당금을 지급하는 회사를 그레이엄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전체 발행주식 4만주 가운데 2000주를 사들였다. 2대 주주의 지위에 오른 후 의결권 대결을 펼쳤다. 결과는 최대 주주인 록펠러재단이 그레이엄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났다. 이 전투를 통해 그레이엄을 비롯한 주주들은 주당 110달러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 유조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시장의 관심 밖에 있던 송유관 회사는 저평가된 채 거래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 두 건의 투자는 그가 처음으로 주식에 적용한 '내재가치가 높은 저평가 기업에 투자하라'는 철칙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그레이엄은'현명한 투자자'라는 책에서 투자에 임하는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사업하듯 투자하라△시장등락에 연연하지 말라△저가에 매수하라는 게 그것이었다. 자신이 투자하는 회사를 알지 못하면 투자하지 말라는 것이며,회사를 알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면 충분히 낮은 가격에 매수한 후 시장변동에 휩쓸리지 말고 보유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1972년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투자대상 회사의 중요성에 대해 "이 주식들을 위한 시장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기꺼이 이 회사에 투자할 수 있다면 주식을 사라"고 조언했다. 1976년 그가 사망한 후 포브스지에는 '마지막 유언,그리고 마지막 유서'라는 제목의 10가지 핵심투자 공식이 공개되기도 했다.

21세기를 지배한 그레이엄의 이 같은 투자철학은 1917년과 1930년 두 번의 크나큰 실패속에 얻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되새겨볼 만하다. 그는 "1917년 고객의 계좌를 파산직전까지 몰고갔을 때는 자살을 고민했을 정도였고 50%가 넘는 손실을 기록했던 1930년은 33년간의 투자역사에서 최악의 한 해였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상건 이사는 "그레이엄은 '현명한 투자자'에서 '투자는 기법과 기술이 아닌 철학과 태도의 문제'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요즘처럼 어려울 때 투자자들이 자신의 투자철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만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