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6월30일 새벽 서울 신사동 한 해장국집.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한무리의 손님들이 몰려왔다. 꾹 다문 입에 얼이 빠진 표정들.그들은 해장국을 시켜 먹기 시작했다.

그중 한 사람의 와이셔츠에 뻘건 국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해장국이 입에 들어가지 않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동화은행 테헤란로 지점 직원들과 차문현 지점장(현 유리자산운용 사장)이었다. 그들은 전날 발표된 은행 퇴출 결정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전날 정부는 은행 구조조정을 위해 동화 동남 대동 경기 충청 등 5개 시중은행을 퇴출시킨다고 발표했다. 차 사장은 그때 은행에서 쫓겨난 수만명의 은행원 중 하나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모든 것을 바친 은행이 문을 닫다니.내 인생은 도대체 뭔가,내 잘못이라곤 열심히 일한 것밖에 없는데…"라는 회의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럴 만했다. 은행에 취직해 4명의 동생을 가르쳤다. 평생의 배필을 만난 곳도 은행이었다. 그의 꿈도 은행에서 임원을 하고 은행경영을 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친듯이 달려온 것 아닌가. 1995년 동화은행이 도산로 지점을 개점하며 그는 초대 지점장으로 발탁됐다. 기대에 걸맞게 석 달 만에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년 만에 3000억원의 예금을 유치해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었다. 이어 테헤란로 지점장으로 옮겨 동화은행 최대 지점으로 키워냈다.

그러나 결과는 허무했다. 은행은 망했고 그도 갈곳이 없어졌다. 남은 것이라고는 영업에 쓰기 위해 진 빚 1억3000여만원과 집 한 채,그리고 가족이 전부였다.

며칠 후 그는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머리에는 빨간 띠를 동여맸다. 직원들과 함께 퇴출에 반대하는 농성에 들어간 것."죽어서 이 일이 해결될 수 있다면 뛰어 내리고 싶다"며 건너편 건물 옥상을 바라다보던 절망의 시기였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집을 팔아 빚을 갚고 다시 그 집에 전세로 눌러 앉았다. 중학생,고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학원도 그만뒀다. '죽어야 하는 것 아닌가'하며 보험증서를 몇 번이나 들었다 놓기도 했다.

그가 다시 삶에 대한 의지를 찾은 것은 한강변에서였다. 잠못 이루던 어느날 새벽 조용히 집을 빠져나와 무조건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새벽 5시가 갓 넘은 시간인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보다 앞서 한강변을 뛰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일까?'.

다음날 그는 새벽 4시에 나갔다. 그때도 자기보다 앞서 뛰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 다음날은 새벽 3시에 나갔다. 그제서야 가장 먼저 트랙을 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새벽부터 뛰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진짜 정신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그의 꿈은 은행장이었다. '꿈을 놓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진다. 꿈을 갖고 강한 마음을 먹으면 무엇이든 새로운 목표를 향해 갈 수 있게 된다'고 몇번이고 되뇌었다.

그런 열망이 하늘에 닿았을까. 머리띠를 두른 지 두어달쯤 지나서 CJ그룹에서 연락이 왔다. 제일투자신탁을 인수한 CJ가 법인영업을 담당할 사람을 물색하던 중 그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제일투자신탁에 들어가 본업인 영업 현장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행복했다. 3년 만에 수탁액을 3조원 가까이 늘리는 수완을 발휘하며 꿈꾸던 금융회사 이사 자리에 올랐다. 네트워크의 힘이었다. 차 사장은 "사람을 만날 때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 항상 고민했다. 정보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정보를,금융지식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지식을 준비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네트워크가 인생 최대의 자산이 됐다"고 설명했다.

2001년 그는 우리증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법인영업을 맡아 소형 증권사인 우리증권을 수익증권 판매부문에서 5~6위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2005년 LG증권과의 합병으로 또다시 혼란기가 찾아왔다. 다시 절망으로 떨어질 찰나. 마침 유리자산운용이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제안해 왔다. "그때 CEO의 꿈이 날 다시 움직이게 했다"는 게 그의 회고다.

그리고 2005년 5월 유리자산운용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3년여 만에 그는 8300억원의 수탁액(순자산 기준)을 4조원 넘게 불렸다. 또 유리자산운용을 인덱스펀드 부문 강자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차 사장은 "군대에서 선임 분대장하던 시절 동료들 대신 매를 맞았던 것과 동화은행이 퇴출돼 일자리가 없어졌을 때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다"며 "그후 무엇을 하건 두려움이 없어진 것 같다"고 돌아봤다. 시련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출발선이 될 뿐이라는 얘기였다.

그는 "지금도 과거 외환위기 때 함께 시련을 겪었던 동화은행 후배들이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며 "덤이라고 생각하고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며 얘기를 맺었다.

글=김용준/사진=양윤모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