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이후, 국내 주식투자자들은 눈앞에서 돈잔치가 벌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글로벌 유동성 장세가 펼쳐지면서 국내 증시로 몰려 온 외국자금이 한국 주식을 사들이며 국내 증시의 2대주주가 되는 모습을 본 것이다. 올해 초반까지 팔아치우기에 열심이었던 외국인들은 4월28일 이후 순매수로 전환했다.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누적순매수 규모는 12조원을 넘어섰다. 하루 평균으로는 1,000억원어치를 계속 사들인 셈이다. 덕분에 지수 역시 꾸준히 오르며 800선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그동안 개인들은 지수가 상승할 때마다 야금야금 내다파는 전략으로 일관했다. 지수상승에 따른 수익을 얻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기관은 별다른 추세를 형성하지 못했다. 거래소뿐만 아니라 코스닥시장에서도 국인 비중은 계속 확대되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이 접수한 것은 현물시장만이 아니다. 선물시장에서의 외국인 비중은 9월 말 기준 19%로 높아졌다. 한국 주식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외국인은 대체 누구일까. 국내에서는 보통 ‘외국인투자가는 엄청나게 합리적으로 투자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그들도 마찬가지로 투자심리에 의해 좌우되는 보통사람들이다. 그리고 외국인이라고 한데 묶어서 말하지만, 국내 투자자들과 마찬가지로 제각각 이해관계에 따라 수많은 개체들이 따로따로 움직인다. 대체로 자금력이 좋으니 한 세력이 움직이는 자금규모의 차원이 다르다는 차이야 있지만 말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한국에 투자하기 위해 등록한 외국인의 38.3%는 미국인이다. 미국 국채로 돈이 몰리니까 주식이 상대적으로 싸지면서 주식으로 돈이 들어왔고, 경기 회복까지 가세하면서 주식 강세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 주식시장이 살아나면서 유동성이 풍부해지니까 미국 기관투자가들이 해외로 나가고 결국 전세계적 동반상승 현상이 나타난다. 국내 증시에 흘러온 돈도 같은 흐름 속에 있다. 주가상승 기대가 높아진 미국 투자자들이 펀드에 돈을 넣는다. 다우지수 편입종목 같은 우량주에 돈이 넘치면 나스닥 같은 기술주로 옮아가고, 여기에 불이 붙으면 기술주 비중이 높은 이머징마켓 증시로 주가상승 기대가 옮겨온다. 극동아시아펀드, 이머징마켓 인덱스펀드, 엑스 재팬 아시아펀드(일본을 뺀 아시아펀드)에 돈이 몰리는 것이다. 펀드에 자금이 늘어나면 이머징마켓담당 펀드운용자들은 한국 투자를 늘리고, 한국주가는 시가총액 상위 블루칩이 뜨며, 이 주식들이 뜨면 지수가 움직인다. 따라서 미국인의 한국주식 매수세는 나스닥에 후행하게 돼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향후 외국인의 매매 방향 역시 미국증시와 나스닥의 사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구조다. 이렇게 국내 주식시장을 외국인이 지배하게 된 것이 한국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이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는 워낙 순식간에 시장 ‘접수’가 진행된 터라 정신 차리지 못하고 지수 오르는 것만 쳐다보기에 급급한 형국이었다. 국내 주식시장에 외국인 돈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부터다. 보유한 외환이 거의 거덜난 것이나 다름없었던 당시에는 상황이 워낙 급박했기 때문에, 시장을 여는 일이 아주 신속하게 진행됐다. 96년 10월까지 20%로 묶여 있던 외국인 소유한도는 97년 5차 증시개방 때부터 23%로 늘기 시작해 같은해만 모두 세차례에 걸쳐 그 폭을 확대해 갔고, 98년 5월 마침내 완전히 폐지됐다. 이 시점부터 국내 증시에 유입되기 시작한 외국자본은 2002년을 예외로 하면 계속 사들이는 중이다. 이렇게 외국인의 주식시장 지배력이 높아지면 시장효율성이 개선되는 효과가 있다. 즉 투기적인 국내 증시의 변동성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개선하는 효과도 나타난다. 아무리 짧아도 1~2년은 내다보고 투자하는 외국인들의 행태를 계기로 장기투자 관행이 자리잡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해 봄직하다. 또한 최근 폭발적으로 증가한 주식시장에서의 외국인 비중이 우려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선진시장을 비교하면 한국과 유사한 수준의 외국인 지분율을 보유한 국가들이 많다. 영국과 호주의 외국인 지분율이 32%와 36%로 우리와 유사한 수준이며, 스페인 스웨덴도 외국인 비중이 34%와 39%에 달하고 있다. 특히 노키아가 상장돼 있는 핀란드는 외국인 비중이 70%나 된다. 반면 대만이나 태국 등의 아시아 신흥시장에서는 20%를 넘지 않는다. 따라서 높은 외국인 투자비중은 선진시장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며, 삼성전자와 같은 글로벌 기업을 보유한 한국증시의 높은 외국인 비중은 비정상이 아니라는 견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의 목소리는 계속 증폭되고 국내 투자자들의 고민은 점점 깊어간다. 무엇보다 지금은 주식시장을 개방했던 98년과는 상황이 다르다. 당시에는 외환보유고를 늘리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 그것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국내에 자금이 모자라기는커녕 남아돈다. 국부 유출에 대한 우려와 더불어 우량기업을 중심으로 외국인 지분율이 높아지면서 경영권이 제한돼 경영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불만도 기업인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의 미래 성장잠재력도 제약받을 수 있다. 외국인 투자는 자본이득을 중시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 수익을 언제 거둘지 기약이 먼 설비투자보다는 배당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법인세 인하를 둘러싼 논의에서 보듯이 경제정책마저 외국인 위주로 흘러간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현재와 같은 외국인의 나홀로 장세가 계속될 경우, 국내 투자자가 증시를 외면해 기업 자본조달이라는 증시 본래의 기능이 줄어들 가능성 등도 거론된다. 외국인이 현물시장뿐만 아니라 선물시장까지 한꺼번에 좌지우지 하면서, 현ㆍ선물 연계거래로 시장을 교란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이보다 더 단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지금 국내 투자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주식을 매수한 외국인이 1~2년을 보유하는 뮤추얼펀드이든, 단기차익을 노리는 헤지펀드의 성격이든, 어쨌든 평생 들고 있지는 않을 것이므로 언젠가는 팔아야 한다. 일부는 사고, 일부는 조금씩 팔고 이렇게 시장이 오르락내리락한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워낙 단기간에 한꺼번에 샀기 때문에 이런 정상적인 시장흐름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큰 폭의 주가 하락 없이 주식을 처분하려면 그 물량을 받아줄 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국내에서 얘기가 되고 있는 국민연금의 주식투자 확대나 기업연금제도의 도입 등이 현재와 같은 외국인 장세에서 시행되면, 저가에 선취매한 외국인의 물량을 고스란히 받아주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싱가포르 투자청(GIC)과 같은 경쟁력 있는 대형 투자기관을 키우는 것이 최선의 대응방법이라고 말한다. 퀀트 애널리스트(계량분석가)인 삼성증권 이기봉 연구위원은 “설립 이후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도 미국 및 유럽계 투자기관 사이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며 성장하고 있는 싱가포르 투자청이 우리가 벤치마킹할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싱가포르 투자청은 싱가포르 정부의 공공기금 운용을 위해서 1981년 만들어졌고, 싱가포르 정부가 지분을 100% 소유하고 있다. 전세계 30개 이상의 시장에서 주식, 채권, 부동산 등의 투자활동을 하고 있으며 싱가포르의 외환보유액을 주요 자산으로 해서 1,000억달러를 운용한다. 이에 해당하는 후보라 볼 만한 우리나라 기관이 있다면 정부기관 또는 연기금이다. 하지만 싱가포르 투자청 모델이 장기적으로 볼 때는 대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당장은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 국내 투자자의 고민은 점점 더 깊어진다. 외국인의 주식매수를 멀거니 보고 있으면 우량주식을 다 뺏길까 걱정스럽고, 매수에 나서려니 외국인들의 단기적인 이익실현에 들러리만 설 가능성이 있다. 딜레마다. 김수연 기자 soo@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