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수출기업들이 환율변화에 민감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97년 외환위기 당시 된서리를 맞은 기업들이 이후 환리스크에 대해 많은 관심을 쏟자 관련 컨설팅업체들이 잇따라 등장했을 정도다. 하지만 최근의 원화 절상 추세와 관련해 나타나는 분위기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일단 정부가 환율방어 의지를 적극 표명하고 나선 것이 매우 이례적이다. 지난 10월 말 김진표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시장개입을 지속할 수 있음을 밝힌 가운데 재경부는 11월 중으로 외환시장 안정용으로 국채 4조3,000억원어치를 발행할 예정이다. 지난 9월 말 두바이에서 개최된 서방선진 7개국(G7) 재무장관 회의에서 ‘유연한 환율제도’에 관한 성명서가 채택된 것을 계기로 원/달러 환율이 하락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10월13일 원/달러 환율은 1,147.2원에 마감했다. 이는 마감가 기준으로 지난 2000년 11월17일 1,141.8원 이후 최저치다. 문제는 현재의 원/달러 환율 수준이 우리 경제여건과 괴리된 채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소비와 투자가 모두 위축되는 등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있어 경제 회복 속도가 더딘 국내 여건상 원화 강세는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결국 원화 강세는 미국경제의 취약성으로 인한 달러화 약세가 근본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의 45% 이상이 중국, 일본, 대만,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에 집중돼 있을 뿐만 아니라 이는 점차 심화되는 추세다. 따라서 G7 재무장관 회의에서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에 환율 유연성을 요구한 것도 이들 국가에 대한 무역역조 해소를 위해서다. 또 경상수지와 재정수지가 동시에 ‘쌍둥이적자’ 상태를 보이는데다 부시 대통령 지지도 하락이라는 정치적 상황까지 맞물려 있어 원/달러 환율은 당분간 하락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외환당국이 환율방어 의지를 밝히고 있지만 현시점에서 환율흐름의 방향을 전환하거나 특정 환율 수준을 사수하려는 시장개입은 G7 성명처럼 오히려 환율급락의 충격을 야기할 빌미가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환율전망과 이에 대한 대응방안을 짜내려는 기업의 고민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전문가들은 올 4분기 원/달러 환율은 분기 평균 1,140~1,160원 정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내년에는 연 평균 1,100~1,120원대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원화 절상 기조는 내년까지는 지속된다는 것이다. 환율문제에 직접 부딪치는 기업의 경우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하고 있다. 내년 사업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 삼성은 1,000원까지 내려갈 것에 대비해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특히 기업 입장에서 우려하고 있는 것은 환차손보다 수출 감소 문제다. 지난 10월 초 대한상공회의소에서는 서울지역 수출기업 3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최근 환율변화에 대한 기업인식’이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54.5%가 원화 강세를 향후 영업활동에 가장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통상환경이라고 지적했다. 더욱이 가장 우려되는 것은 이들 수출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되면서 이것이 투자ㆍ생산 위축으로 이어지는 경기침체의 장기화 문제다. 최근 환율수준은 이미 주요 산업의 적정환율 수준을 하회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섬유, 화섬, 공작기계, 양회 등 일부 산업의 경우 손익분기환율이 현 환율수준보다 높아 수출채산성 적자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 10월 중순에 내놓은 ‘환율하락에 따른 산업별 영향 분석’에 따르면 섬유는 1,227원이 적정환율이며 화섬은 1,250원, 양회는 1,285원은 돼야 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환당국이 현재 표명하고 있는 환율방어 의지라는 것은 그 상징성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 현재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방법은 직접 달러를 사들이거나 채권을 발행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이는 환율 하락 기조를 바꾸기 어려울뿐더러 미국의 하락압력을 일시에 자극해서는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외환당국이 굳이 ‘미세조정’(스무딩오퍼레이션ㆍsmoothing operation)이라는 용어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현재의 원화 강세 기조에서 정부의 역할은 기업에 예측 가능한 경영환경을 조성해 주는 데 맞춰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 환투기 세력을 견제하는 미세조정자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동시에 주요 수출국과 환율괴리가 생기지 않도록 하락세를 맞춰갈 필요가 있다. 예컨대 하락 기조는 유지하되 강화되고 있는 원화와 엔화의 비동조화(디커플링) 현상에 대한 명분을 쌓는 일이 중요하다. 즉 대미 무역흑자 규모에 있어 중국, 일본과 우리나라가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미국과 주변국에 부각시켜야 할 것이다. 원화 강세가 대세로 부각되는 현시점에서 기업 역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현재 국내 기업은 무역결제의 75% 이상을 달러화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제통화를 다변화해 환차손을 줄이는 한편 외화표시자산의 적절한 헤지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한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사내에 환리스크 관리를 담당할 수 있는 인력을 갖추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환율 수준이 크게 달라지더라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제품의 기술력을 높이는 게 최상의 대책일 것이다. 또 탄력성 있는 임금제를 통해 원가를 낮추는 노력도 함께 진행돼야 한다. 결국 장기적으로 수출기업들은 향후 원화 강세를 당분간 기정사실화하고 1,100원대 이하의 환율 수준에서도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체질개선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신용상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장기적으로 수출과 산업의 구조 재편이 진행돼야 한다”며 “환율은 결국 이를 재촉하는 한 요인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소연 기자 selfzone@kbizweek.com .............................................................................. [노무현 정부 경제정책 집중 분석] 시장개혁 로드맵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 소유 및 지배구조 개선과 대주주의 책임경영 강화를 골자로 한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을 발표했다. 출자총액규제를 받고 있는 11개 대기업집단에 대해서는 오는 2006년까지 대주주의 실질 지배력을 보유지분의 6.1배 수준(현재)에서 3배 이하로 떨어뜨리도록 유도하고 소액주주가 의결권을 쉽게 행사할 수 있도록 주주총회 전자(인터넷)투표제도를 도입하는 방안도 마련키로 했다. 이밖에 그룹 계열사와 친인척의 지분관계를 직계존비속과 혈족 2~4촌 등으로 구분해 매년 공개하고 대기업 구조조정본부의 활동내용과 경비조달, 사용내역, 계열사간 비용분담계약 등도 공개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이 같은 공정위의 방침은 어느 정도 예고돼 온 것이긴 하지만 그 파장이 경제계 전반에 미친다는 점에서 상당한 파괴력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대주주의 실질 지배력을 현재 수준의 절반 이하로 떨어뜨리라는 것은 시가총액 기준으로 보유 기업의 절반을 처분하라는 얘기와 같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대주주가 지배력을 행사하는 회사가 자회사를 만들고, 자회사는 또 다른 회사에 투자하는 식으로 운영돼 왔다. 예컨대 대주주가 10%의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 A가 다른 회사 B에 10%를 투자할 경우 대주주는 A회사의 지분 10%와 B회사의 지분 10% 중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10%)인 1%를 합쳐 11%의 지분을 갖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A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주주가 B회사 주식 10%의 의결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대주주의 실질 기업 지배력(20%)은 실제 보유주식(11%)의 1.9배에 이른다. 이 대주주에게 기업 지배력을 절반으로 줄이라고 요구할 경우 B회사 투자를 아예 포기하거나 자기 돈으로 B회사의 주식을 매입하라는 얘기다.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하고 있는 회사들은 대주주가 돈이 없어 지분관계를 정리하더라도 당장 문을 닫는 것은 아니다. 소유주가 바뀌거나 외국 자본가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지만 회사는 그런대로 돌아갈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대기업들의 신규투자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기업들이 계열로 편입한 자회사들을 처분해야 하는 마당에 새로 기업을 시작하거나 시장에서 기업을 매입(M&A)할 여력을 갖기가 어렵다. 재계가 공정위의 방침에 반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신종익 전국경제인연합회 상무(기업정책 태스크포스팀장)는 “의결권 승수가 높으면 지배구조가 나쁜 기업이고, 지배구조가 나쁘면 소액주주들을 희생시키면서 대주주가 회사돈을 빼돌린다는 논리”라며 “하지만 의결권 승수, 지배구조, 소액주주 희생이라는 세가지 개념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출자총액제한제도를 2006년 말까지 현행 틀을 유지하고 부채비율 100% 미만 기업집단에 출자총액제한 규제를 면제해주던 것을 2005년부터 폐지하겠다는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공정위는 시장규율을 통해 기업의 지배구조를 건전하게 바꾸겠다는 뜻을 강조하고 있지만 시장의 반응이 ‘반발’로 나타나는 것은 대책에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다. 현승윤·한국경제신문 기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