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신탁회사들이 유동성 위기(현금부족)에 몰리면서 투신시장이 사실상 마비상태에 빠졌다. 지난 1999년 8월의 "대우채 파동"이후 3년여만에 똑같은 금융혼란이 되풀이된 것이다. 투신사 관계자들은 "상장회사 1개 기업의 분식회계사태로 인해 1백80조원 규모의 거대한 투자신탁시장이 한순간에 정지될 정도로 투신산업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을 입증했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이번 "SK 후폭풍"사태가 진정되더라도 부도채권 발생에 따른 잠재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차제에 이런 악순환을 막기위해서라도 투신업계 스스로 과감한 제도개혁과 강력한 구조조정에 착수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한다. 금융시장의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는 투신시장의 현 주소와 대응책을 시리즈로 짚어본다. ◆금융회사의 도박장으로 전락=지난 1999년 8월 '대우채 환매제한 조치' 이후 투신사와 증권사의 대외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 '투신(증권)의 펀드에 돈을 맡겼다간 잘못하면 원금마저 떼일 수 있다'는 인식이 투자자들 사이에 뿌리 깊게 박힌 것이다. 대우채 파동 이후 영업기반이 약해지자 투신사들은 금융회사 등 법인 자금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생존의 위기'를 느낀 일부 투신사들이 선두에 섰으며 다른 투신사들도 이에 뒤질세라 자금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런 와중에 '유동성 확보'나 '위험관리'라는 투신 경영의 ABC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저(低)금리,기업대출 감소 등으로 여유자금을 굴릴 데가 마땅치 않는 은행 보험사 등 금융회사들은 투신사의 이런 약점을 적극 활용했다. 실적배당 상품인데도 불구하고 확정금리를 요구했으며 심지어 '금리 입찰'도 마다하지 않았다. 투신사의 자금유치 경쟁은 올 들어 더욱 격심해졌다. 연초 이후 지난 11일까지 투신사에 순유입된 돈은 모두 16조4천억원.수시로 인출할 수 있는 MMF는 10조9천억원,3개월 미만 단기 채권형펀드는 5조5천억원이 늘어났다. 은행 보험 연기금 일반기업 등 법인자금이 이들 자금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위기관리 떨어진다=투신권이 은행 등 금융회사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데는 투신사의 모럴해저드가 주원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투신사 경영진은 "펀드를 많이 팔수록 이익도 커지고 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높아진다(B투신 사장)"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동성위기 등 문제가 터지면 감독당국에서 알아서 해결해주겠지"라는 '관치금융 만능주의'풍토도 여전하다. 실제 지난 12일 2천억원의 환매요청을 받은 한 증권사는 문제가 된 SK글로벌 채권을 자기계정으로 떠 안는 조건으로 자금을 유치하는 과감한 영업을 벌였다. 환매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투신사 사장들은 13일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정부에 시장안정대책을 요구했다. 반면 한국?대한 등 대형 투신사들이 이번 파문을 비껴간 것은 대우사건을 거울삼아 초기 대응을 잘한 때문으로 해석된다. 우재룡 한국펀드평가 사장은 "은행 등 금융회사는 모든 리스크를 투신사에 떠넘기고 있다"면서 "금융회사들의 체계적인 자금관리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으면 이같은 악순환고리는 쉽게 끊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