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경제위기는 이론적으로 유동성 위기(liquidity crisis)와 체제 위기(system crisis)로 구분된다. 과거의 예를 보면 개도국들은 대개 유동성 위기에서 체제 위기로의 경로를 밝아간다. 반면 선진국은 일반적으로 그 반대경로를 거치는 것이 수순이다. 현 시점에서 세계경제를 보자.이미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는 곳이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중남미 지역이다. 이 지역은 유동성 위기와 시스템 위기를 넘어 실물경제에의 영향이 본격화되면서 경제수축기를 맞고 있다.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는 올 1·4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 16%대까지 추락했다. 일단 경제가 수축되기 시작하면 유동성 위축과 경제 시스템의 단점이 더욱 노출되면서 위기가 반복되는 악순환 국면에 처하게 된다. 중남미 국가들은 바로 이 단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중남미 국가와 정도 차는 있으나 터키와 인도네시아의 위기도 갈수록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분위기다. 선진국 중에서는 일본이 시스템 위기에 몰린 지 오래됐다. 일본 금융기관들의 부실채권만 하더라도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34조8천억엔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이보다 3∼5배가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책적인 측면에서도 금융기관들의 부실채권을 해결할 수 있는 여유가 거의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시스템 위기가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으면서 점차 유동성 위기로 전이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점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해 말 일본 금융기관들의 아시아 지역에 대한 융자잔고가 5년 전에 비해 절반 이상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올해 들어서는 미국이 시스템 위기에 몰리고 있다. '발생주의 회계원칙·주주이익 중심의 경영·시장지상주의 평가제도'로 대별되는 미국 자본주의 체제가 근본적인 결함을 드러내면서 미국을 포함한 국제금융시장이 난기류에 빠지고 있다. 다행히 세계경제가 아직까지는 이런 위기에 따른 부담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상태다. 지난해 세계 각국의 금리 동반인하로 국제유동성이 신용경색(credit crunch)을 불러 일으키는 단계는 아니다. 올 들어 주가하락에 따른 성장둔화 효과(anti-wealth effect)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세계경제 성장률이 잠재수준을 웃돌아 경기재둔화(double dip)에 대한 우려가 기우(杞憂)로 끝날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세계 각국의 위기상황이 조속한 시일 내에 마무리되지 않을 경우 세계경제와 국제금융시장은 한동안 위기에 따른 후유증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중남미를 비롯한 개도국 경제위기는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이 어떤 입장을 보이느냐가 관건이나 '신속지원의 원칙'을 취하던 종전과 달리 경제위기는 위기를 발생시킨 당사국의 책임이라는 '자기책임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어 단기간에 위기해결은 어려워 보인다. 이미 자금회수에 나서고 있는 일본도 앞으로 유동성 사정이 썩 밝은 편은 아니다. 제조업 공동화와 제로금리 정책으로 무역흑자 증가와 외국인자금 유입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는 엔화 강세에 따라 일본 수출기업을 중심으로 채산성마저 다시 악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경우 연방기금금리가 40년 만의 최저수준인 1.75%다. 테일러 준칙(Taylor's rule)을 통해 적정금리 수준을 따져보면 앞으로 금리를 내려 유동성을 공급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평가된다. 올 회계연도에 재정적자가 1천6백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보여 재정사정도 여의치 못하다. 올 들어 계속된 주가하락으로 미국 기업들의 캐시플로 악화도 예상된다. 한마디로 현 시점에서 경제위기가 마무리되지 못할 경우 세계경제는 신용경색 현상이 심화되면서 경기재둔화에 대한 우려가 본격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기로(岐路)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경제위기 극복노력이 조속한 시일 내에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를 기대해 보는 것도 이런 이유다. 논설·전문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