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린치,리먼브러더스 등 초대형 금융사가 몰려있는 영국 런던 중심가의 핀즈베리 거리.HSBC 본사도 이 곳에 자리잡고 있다. HSBC 연기금투자담당 수석디렉터인 앤드루 플레처는 "고객의 자산을 관리 운용하는 회사로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신뢰"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수십년에 걸친 HSBC의 영업활동은 투자자의 신뢰를 얻기 위한 시행착오 과정에 불과하다"며 "투자자로부터 '믿음'을 얻기 위해 회사가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유럽은 물론 미주 아·태지역 등 전 세계 80여개국에 7천여개의 점포를 가동 중인 HSBC.'투자자의 신뢰=회사의 존속'이라는 기본 철학에 충실한 게 이 회사의 글로벌 경쟁력이란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국내 기관들의 사정은 어떤가. 한마디로 각사마다 뚜렷한 운용철학이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 같은 문제는 대주주(증권사 은행)와 자회사인 투신운용사 간의 수직적 관계에서부터 비롯됐다. 무엇보다 고객의 소중한 자산을 관리 운용해야 하는 투자신탁운용에 대한 개념 정립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 대주주의 인식 변화가 무엇보다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투신운용사를 자회사로 갖고 있는 증권사나 은행은 투신운용의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모기업의 인사 적체를 풀기 위한 자리로 활용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 투신운용사 관계자는 "자산운용업무 경험이 전혀 없는 모기업 전직임원이 투신운용사 사장으로 내려오는 게 다반사"라고 지적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자산운용사의 내부시스템은 고객 우선보단 단기외형위주로 짜여질 수밖에 없다. "투신운용사의 모기업격인 증권사의 영업실적이 우선시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자산운용을 하기 쉽지 않다"고 메리츠투자자문 박종규 사장은 말한다. 당장 고객의 입맛에 맞는 단기상품을 개발해 자금을 끌어와야 하고 이렇다보니 펀드매니저의 분기,반기별 수익률을 점검해 평가하는 게 국내기관들의 현 주소다. 국내 펀드매니저는 별다른 특성을 갖지 못한 '붕어빵'그룹이라는 자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모회사의 판매에 눈치를 보며 똑같은 상품을 단기간 운용하다보니 색깔있는 펀드매니저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메리츠투자자문 박 사장은 "투신운용사의 철학부재-운용보다 상품판매 우선-펀드매니저의 운용 단기화-경쟁력있는 펀드매니저 부재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메릴린치증권의 유럽·아프리카투자담당 박천웅 애널리스트는 "IMF환란 이후 투명성 확보 등 글로벌기업으로 거듭난 삼성전자,현대자동차 등 장기투자 대상기업들이 늘고 있다"며 "한국 기관들도 이러한 흐름에 맞춰 확고한 투자철학을 세우는 게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런던=김동민 기자 gmkd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