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의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경제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일본이 심각하다. 80년대 초 단순한 부품공장이 해외로 이전하기 시작한 일본은 해가 갈수록 그 속도가 빨라지면서 올해 들어서는 첨단산업까지 진출하고 있는 상태다.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아직 일본에 남아 있는 대기업 중 앞으로 3년 이내에 해외진출을 계획하고 있는 기업은 50%나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충격적인 것은 해외진출을 계획하고 있는 기업 가운데 약 91%가 중국으로 진출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심각해짐에 따라 무역수지도 조만간 적자로 돌아설 위기에 놓여 있다. 일본 내각부의 전망에 따르면 내년 1분기에는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설지 모른다는 예상이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올 들어 국내 기업들이 '탈(脫)한국' 러시를 이루면서 지금까지 해외에 투자한 총금액의 약 80%가 제조업이다. 특히 국내 제조업체들의 중국 진출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도 일본과 비슷한 현상이다. 반면 외국인 제조업체들이 한국을 기피하는 성향은 강해져 올 들어 국내에 투자한 외국인 직접투자 가운데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불과하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과거 같으면 우리나라에 투자해야 할 기업들이 중국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정도차는 있지만 대만 홍콩 등 동남아 국가들도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처럼 아시아 국가들에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는 것은 크게 두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하나는 제조업 공동화 문제가 발생되는 국가의 책임으로 자국의 제조업체가 국내에 머무르거나 외국인 제조업체들이 투자할만한 유인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간이 갈수록 이같은 요인이 커지고 있어 여타 아시아 국가와 중국 간에 묘한 냉기류가 감지되고 있는 상태다. 이미 중국과 일본 간에는 이런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다. 최근 일본은 노골적으로 중국에 대해 압력을 가하고 있다. 특히 위안화가치가 중국의 경제 여건에 비해 낮게 운용됨으로써 일본이 겪고 있는 수출 부진과 제조업 공동화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진단이다. 현재 중국은 '1달러=8.28위안'을 중심환율로 하는 고정환율제를 유지해오고 있다. 문제는 중심환율이 너무 낮다는 점이다. 실제로 실질실효환율로 위안화의 적정수준을 추정해 보면 6.8∼7.0위안으로 나온다. 이에 따라 일본은 중국이 시장잠식을 뛰어넘어 '산업찬탈(産業簒奪)'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일본 기업을 유치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론적으로 한 나라의 통화가치를 어떻게 운용하느냐의 문제는 대표적인 '이웃 궁핍화(窮乏化)정책'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어느 한 나라가 통화가치를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해 얻어지는 수출과 경제성장 측면의 이득은 인접국 또는 경쟁국들의 희생에 다름아니라는 견해다. 현재 일본과 중국이 처한 여건과 또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현실을 감안할 때 양국간 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동북아 경제질서에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는 중요한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어떤가. 동아시아의 양대 경제대국인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국면에 놓여 있다. 오히려 일본과 비슷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경제의 위상이 좌우된다. 만약 표면화되기 시작한 일본과 중국 간 갈등구조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할 경우 일본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외환당국의 적극적인 자세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특히 표면화되고 있는 통화마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는 주변국의 통화가치 흐름에 맞춰 가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다. 시장자율에 맡긴다는 것은 명목은 좋으나 최근과 같은 환경에서는 외환당국의 자유방임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높다. 중·장기적으로는 우리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간자 혹은 균형자(balancer)의 역할을 잘 활용해서 현재 이 지역에서 구상되고 있는 한·중·일 3국간,혹은 동아시아 자유무역지대(FTA)라든가,통화스와프 협정체결,공동화폐 도입 문제 등을 원만하게 매듭지어야 우리 경제의 안정성을 보장받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전문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