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증권의 기업금융팀 K부장은 요즘 출근하기가 무섭게 '눈도장'만 찍고 바로 외출해 버린다. 외출사유는 '기업실사'지만 핑계일 뿐이고 그냥 밖에서 시간을 때운다. K부장은 "코스닥등록 예비심사를 통과한 업체의 사장들이 공모주 청약일정을 왜 빨리 안잡느냐고 닦달하는 통에 피해다니는 형편"이라고 호소했다. 미국 테러사건 이후 증시가 추락하면서 공모주 시장에는 이같은 해프닝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 당초 계획대로 등록하다간 등록 이후 주가가 공모가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증권사들로선 가뜩이나 어려운 형편에서 신규등록기업의 주가부양을 위한 '시장조성'에 뭉칫돈을 들일 여력이 없어 청약 등의 일정을 늦추거나 공모가를 낮추기 위해 해당업체들과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이로 인해 예비심사를 통과한 기업중 아직까지 금융감독원에 공모주 청약을 위한 유가증권신고서조차 제출하지 못한 기업이 무려 26개사나 된다. 내달 30개사가 청약을 받을 예정이지만 이중 9개사는 시장침체로 이월됐던 데다 내달에도 계획대로 청약이 이뤄질지도 불분명하다. 공모주 시장이 마비상태로 치닫고 있다는 얘기다. 증권사 기업금융팀의 입지가 위축된 데에는 최근 사내 리스크 관리위원회의 파워가 부쩍 세진 것도 한몫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배보다 배꼽이 커질지 모를 리스크를 가진 등록사업을 웬만하면 피하라고 연일 경고를 보내고 있다. K부장같은 기업금융부장 대부분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시장조성이 속출한 탓에 할 말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외면받는 신규등록주=윤디자인연구소의 주간사인 미래에셋증권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 18일 등록된 윤디자인연구소가 등록 후 다음날부터 3일 연속 하한가로 곤두박칠쳤기 때문이다. 이 기업은 기관투자가들이 배정받은 물량중 94% 정도를 1개월 이상 의무보유하기로 약속했는 데도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터라 충격이 더 크다. 한화증권 김중년 IB2부 팀장은 "공모주 시장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유통시장에서 이를 떠받칠 만한 매수세력이 없다는 것"이라고 한탄했다. 수급관계가 공급우위로 깨져버렸다는 지적이다. 지난 6월 이후 코스닥에 신규등록한 62개사중 공모가가 무너진 기업은 60%에 가까운 35개에 달한다. 이중 시장조성에 들어간 기업은 24개사나 된다. ◇엄격해진 증권사의 공모기업 고르기=증권사들이 공모기업을 고르는 잣대도 아주 까다로워졌다. 한화증권 기업금융 담당자는 아무리 실적이 좋고 전망이 좋은 업체라도 대주주의 지분율이 30% 미만인 곳은 주간사를 되도록 맡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대신증권은 공모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직등록기업으로 대상을 가급적 한정하고 있다. 또 공모기업의 경우 첫번째 선정기준이 '공모가격에 욕심이 없는 CEO'다. 신한증권은 공모 규모를 최소화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실제로 이 회사가 주간사를 맡았던 카이시스는 통상적인 공모 규모의 절반 수준인 42억원(27만주)이었고 이번주 공모예정인 루보는 33억원(21만주)밖에 안된다. 코스닥 등록을 준비중인 한 업체 관계자는 "코스닥위원회의 예비심사를 통과하는 것보다 증권사의 까다로워진 '눈높이'를 맞추는 게 더 어려워졌다"고 불평했다. ◇치열해질 '옥석가리기'=D증권 기업금융팀 관계자는 "올해 공모주 시장은 사실상 끝났다"고 말했다. 그는 "상황이 이런 데도 금감원이 지난 19일 국감에서 공모주 배정 등에 대한 제도개선 가능성을 일축하는 등 현재 시장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신증권 최성용 기업금융팀 부장은 "이런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공모기업에 대한 '옥석가리기'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면서 "이로 인해 앞으로 성장성이 높은 기업들에 등록 우선순위가 주어지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상택 기자 lim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