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봉 대신 그룹 회장의 별명은 "소금"이다.

보통사람들과는 아예 돈의 끝자리 단위가 다를 만큼 구두쇠라는
말이다.

예를들어 사람들이 한장이라고 말하면서 1백만원을 떠올린다면 그는
십만원을 생각한다.

광주지역 민방 사업이 한창 진행중일 때 대신증권등 민방참여사들이
모여 로비자금을 갹출하기로 했던 적이 있다.

모두가 한장씩 준비하자고 했는데 나중에 돈을 모으고 보니 양회장만이
한단위 낮은 한장을 들고왔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식이다.

물론 누군가가 우스개로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그가 소금보다 짜다는
것은 그를 아는 사람은 다들 동의하는 대목이다.

양재봉 회장은 목포상고 출신이다.

목포상고는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의 모교이기도 하다.

두사람은 한학급에서 공부했고 1,2등을 다투었다고 기억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87년 대통령 선거때의 일이다.

선거가 막바지에 오르고 DJ쪽에서 동기동창인 양회장에게도 자금
지원을 요청해왔다.

양회장을 찾은 DJ의 측근도 결국 빈손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와 평생을 같이 일한 회사 임원들조차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작은
영수증 처리에도 애를 먹는다.

양회장은 "돈을 잘 아는" 사람이다.

60년대초에 당시 현금장사로는 최고로 꼽히던 극장을 몇개씩 차릴
정도였으니 그에겐 돈이 움직이는 길목을 가려보는 혜안이 있었던
셈이다.

결국 그는 "돈의 업"인 금융업에 평생을 바쳤다.

일제하에서 조선은행에 입행했고 해방후 잠시의 외도가 있었지만
한국은행과 조흥은행 한일은행에서 금융의 기본을 익혔다.

대한투자금융을 창설했고 대신증권을 인수해 오늘날 대신생명등
9개 계열사를 거느린 금융전문 그룹의 총수가 됐다.

우리나라의 기업가중에 그만큼 금융업만을 고집해온 사람도 없다.

교보생명의 신용호 회장이 외형에서는 필적할 만하지만 증권,창업투자
보험등 다양성면에서 양회장이 한수위라는 평가다.

그래서 금융전업군 얘기가 나올 때마다 1순위로 거론되는 사람이
바로 그다.

만일 금융계에 지역차별이 없었고 은행업에의 진출이 자유로웠다면
아마도 그는 이미 당대 최고의 은행가가 되어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은행에 근무할 당시 그는 백두진,유창순씨를 같이 모셨다.

그때 이세사람은 각각 정계 관계 금융계에서 입신하기로 약속했고
모두가 약속을 지켰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지금은
많지 않다.

약관의 나이에 평생의 길을 정했고 그길을 걸어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돈을 잘 다스렸던 만큼 대신증권의 역사가 순탄했던
것 만은 아니다.

끊임없는 사고가 얼룩져 있고 그의 참모들 중엔 재판정에까지 서야했던
사람들도 많다.

최근에만 해도 덕산개발 불법커미션건으로 그의 일급참모 김성진씨
(대신투자자문 대표상무)가 구속됐고 몇해전엔 그의 맡사위이기도 한
나영호씨(현 대신경제 연구소 대표전무)가 신정제지건으로 감옥생활을
해야했다.

증권감독원이 증권회사를 감사할 때 대신증권 만큼은 국장급을
직접 감사에 내보낼 만큼 회사운영 전반에 문제도 많다.

증권회사 감사에는 증감원 고참국장출신들이 많다.

그러나 퇴직자들 중에 대신증권 감사로 가고자하는 사람은 불행히도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은 대신증권의 어두운 면이다.

대신증권과 신영증권은 비교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외형의 면에서는 단연 대신증권이지만 질에서 만큼은 신영증권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대신이 질의 경영만을 추구했다면 오늘날 처럼 대형증권사로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일면 타당성이 있다.

대신증권이 어떤 앞날을 설계해 갈 지는 이제 창업세대가 아닌
제2세대들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

대신증권은 고립무원의 상황하에서도 증권,연구소,투자자문,생명보험,
정보통신,팩토링등 9개 계열사를 거느릴 만큼 성장해왔다.

양회장에 대한 평가는 물론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한국적 풍토아래서 비재벌 금융그룹으로 우뚝 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과는 충분히 상쇄되고 남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