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증권 그룹의 양재봉 회장을 말할 때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게 깐다.

양회장이 어떤 사람인가하는 질문을 던지면 대개는 왜 그같은 질문을
하는지를 먼저 되묻곤 한다.

아무도 그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양회장은 그래서 인물탐구에 있어서 만큼은 하나의 큰 의문부호다.

양회장은 친.소가 분명한 사람이다.

그자신도 "좋고 싫은 사람들이 분명"하지만 그를 평하는 사람들도
그에 대한 호.부호가 뚜렷하다.

찬사를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끊임 없이 관계기관에 투서를 해대는
원수진 사람들조차 적지 않다.

양회장은 공과도 분명한 사람이다.

공의 부분을 높게 보면 찬사를 보내게 되지만 과실의 측면을 부각시키면
냉소와 비난을 보내게 된다.

지난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정부 사정 기관,언론사,증권 기관등에
날아든 익명의 투서들은 모두 과실의 측면을 부각시킨데 다름 아니었다.

국회라도 열리면 집중적으로 대신증권의 비행을 문는 질의서가
증권감독원에 쇄도한다는 것도 이제 비밀스런 얘기가 아니다.

거듭되는 위기가 엄습해오고 피눈물나는 극복의 스토리가 있어 대신증권
그룹에는 불굴의 정신이 새겨져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대신증권의 역사는 한편의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처럼 색깔이
분명하다.

대신증권은 32개 증권사중 부동의 2위 자리를 고수해 오고 있다.

재벌사들인 엘지증권도 현대증권도,동서증권과 쌍용증권도 아직은 한수
아래들이다.

양재봉 회장이 대신증권의 전신인 중보증권을 인수할 때(75년)만해도
이회사는 업계 최하위 그룹을 맴돌았었다.

양회장이 인수한 이후 영업실적이 일취월장하던 중 전대미문의 박황
사건(78년)이 터졌고 그는 사장자리를 쫓겨나듯이 물러났다.

이사건은 영업부장이던 박황씨가 고객의 돈 수십억원을 횡령한 당시
로서는 충격적인 사건.

투자자들이 아예 회사에서 밥을 해먹으며 아우성을 쳤고 직원들 모두가
이리저리 죄인처럼 끌려다녔다.

돼지를 키우며 3년의 세월을 곱씹은 끝에 그는 사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양회장이 복귀한 지 불과 2-3년이 지나지 않아 대신증권은 업계 2위로
더욱 화려한 비상의 나래를 펼쳐 세상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불운의 보스가 있으면 목숨처럼 그를 모시는 충직한 부하들도 있게
마련이다.

지금 대신생명의 사장으로 있는 박성욱씨는 은퇴상태에 있는 보스를
대신해 대신증권 주식을 낮은 값에 사모아 양회장이 오너 사장으로
복귀하는 데 결정적인 디딤돌을 깔았다.

증권계에서 양재봉 인맥으로 불리는 안길룡 동양증권 사장,김정태
한신증권 부사장,대신증권 이준호 사장 그리고 그의 아들 양회문씨등이
모두 가슴에 칼을 품고 보스의 복귀와 대신증권의 영광을 위해 뛰었다.

83년께엔 채권투자로 거금을 벌어 대신증권 주식 매입 자금의 곱절을
뽑았고 85년엔 현대자동차 주식 수백만주를 5백원에 사서 2천원에
매도해 업계 2위사로 뛰어오르는 발판으로 삼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선주를 처음 발행한 증권사도 대신증권이요
제일 먼저 몽땅 팔아치운 곳도 대신증권이다.

돈이 벌리면 무슨 일이든 해야하는 그런 헝거리 정신이 오늘의 대신증권을
만들어 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체면을 차리다가는 재벌 증권사들에 밥그릇까지 다 빼았긴다"는
강박관념이 대신맨들의 가슴을 내리 누르고 있다는 얘기다.

양재봉 회장집에는 한벌의 찢어 발겨진 와이셔츠가 걸려있다.

박황사건때 투자자들에게 끌려다니면서 찢어진 옷을 기어이 깁지도
않고 지금까지 걸어두고 있다고 그를 잘아는 모인사는 귀뜸한다.

벌써 10년도 훨씬 지난 그때 옷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