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하지만 찬란했던 20년 전 여름날…영화 '애프터썬'
소피(실리아 라울슨홀 분)는 어릴 적 아빠와 떠난 여행에서 찍은 영상을 발견한다.

당시 아빠 캘럼(폴 메스칼)의 나이는 서른한 살. 성인이 된 뒤 마주한 젊은 아빠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쓸쓸하다.

영화 '애프터썬'은 한 여성이 20여 년 전 아빠와 함께했던 여름밤을 떠올리는 이야기다.

샬럿 웰스 감독은 영상 속 아빠만큼 나이가 든 딸이 비로소 아빠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한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비춘다.

11살 소피(프랭키 코리오)는 여름 방학을 맞아 아빠 캘럼과 튀르키예로 휴가를 떠난다.

여행은 계획만큼 순탄치 않다.

도착한 호텔 로비에는 직원이 없어 한참을 기다리고, 겨우 들어간 호텔 방에는 예약한 것과 달리 침대가 하나뿐이다.

호텔 야외 수영장에서는 시끄러운 공사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란히 선베드에 누워 태양을 즐기고, 수구(水球)를 하고, 스쿠버 다이빙에 도전하기도 한다.

문제 상황을 외면한 채 '즐거운 휴가'를 보내는 데 집중하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캘럼이 처한 상황과 묘하게 겹쳐 보인다.

흐릿하지만 찬란했던 20년 전 여름날…영화 '애프터썬'
어린 나이에 아빠가 된 캘럼은 소피의 오빠로 오해받곤 한다.

소피와 자주 시간을 보내지도 못한다.

홀로 고향 에든버러를 떠나 런던에 자리를 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캘럼은 자신의 불안정한 상태를 덮어둔 채 소피에게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애쓴다.

아빠의 상황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지만,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소피는 여행하며 조금씩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소피는 "에든버러에서 한 번도 소속감을 느낀 적 없다"는 캘럼에게 자신은 고향이기 때문에 소속감을 느낀다고 말하지만, 10대 청소년들 무리에서 처음으로 소외감을 경험한다.

캘럼이 매일 하는 특정 동작을 "이상한 춤"이라고 놀리지만, 여행의 말미에는 묵묵히 옆에 서서 동작을 따라 한다.

그리고 꼭 영상 속 캘럼 만큼의 나이가 된 소피의 눈에는 슬픔과 고독이 가득한 아빠의 얼굴이 들어온다.

꿈속에서 만난 캘럼의 춤은 위태롭기 그지없고, 소피는 그런 그를 꼭 껴안는다.

흐릿하지만 찬란했던 20년 전 여름날…영화 '애프터썬'
'애프터썬'은 주인공 소피처럼 실제로 나이 차가 크지 않은 부모를 뒀던 감독이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보냈던 튀르키예에서의 휴가를 떠올리며 만든 자전적 작품이다.

영화는 관객을 사로잡으려 애쓰지 않는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20여 년 전의 기억을 스크린 위로 끄집어낸 듯 흐릿하기만 하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 남겨지는 여운은 그 어떤 작품보다 깊다.

BBC 드라마 '노멀 피플'로 라이징 스타 반열에 오른 폴 메스칼의 섬세한 연기, 8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된 신예 프랭키 코리오의 도발적인 연기는 극에 깊이를 더한다.

웰스 감독은 첫 장편인 이번 작품에 대해 "오래된 앨범을 들여다보면서 장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나의 청소년기, 특히 나의 부모님,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 많은 것을 회상했다.

평범한 소설처럼 시작된 각본은 글을 쓰는 동안 더 개인적이고 감정적이며 자전적인 것으로 천천히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더 가디언, 뉴욕타임스, 타임지 등 해외 매체에서 꼽은 '2022년 올해의 영화'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칸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전 세계 영화제에서 131개 부문 후보에 오르고 56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월 1일 개봉. 102분. 12세 관람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