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상실증이 유행하는 세상…케이트 블란쳇 제작, 26일 개봉
영화 '애플' 흐리스토스 니코우 감독 "인간은 기억의 산물"

기억을 전부 잃어버린 사람은 과거와 동일한 사람일까.

한평생 경험한 일들이 쌓여 정체성이 형성된다면 기억을 잃었을 때 정체성도 함께 사라질까.

영화 '애플'은 단기 기억상실증이 전염병처럼 유행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이름도 집 주소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 알리스가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알리스는 자신을 찾는 가족이나 친구가 나타나길 기다려보지만, 며칠이 지나도 찾아오는 이가 없다.

병원은 무연고 환자가 된 알리스에게 새로운 경험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그는 자전거 타기부터 낯선 사람과 성관계를 갖기까지 일상적인 경험을 쌓아가면서 이를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기록하는 미션을 받는다.

무표정한 얼굴로 미션을 수행해나가던 알리스는 어느 날 자신처럼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안나를 만난다.

기억상실증이 감염병처럼 유행한다는 기발하고 괴이한 상상에서 시작된 영화는 차세대 그리스 스타 감독으로 손꼽히는 흐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의 작품이다.

영화 '애플' 흐리스토스 니코우 감독 "인간은 기억의 산물"

최근 서면 인터뷰로 만난 니코우 감독은 영화 전반에 걸친 기억과 정체성이라는 소재에 대해 "인간은 그야말로 기억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고 운을 뗐다.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영화를 기획하게 됐다고 밝힌 니코우 감독은 "기억이 없으면 우리는 정체성을 잃게 되는데, 우리가 정체성을 지키면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과거로부터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특별한 서사 없이 인간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기억상실증이 감기처럼 평범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은 기이하지만, 알리스가 느끼는 혼란과 답답함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규칙을 바꾼 영화를 좋아해요.

우화적인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너무 공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더 선호하는 편이죠. '애플'을 기획한 방향도 그랬어요.

"
과거의 기억을 잃은 알리스는 무감각한듯하지만, 상실감과 외로움, 슬픔 등 감정의 조각이 늘 그의 곁을 배회한다.

관객들은 알리스가 미처 느끼지 못한 감정들을 직면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니코우 감독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알리스가 느끼는 감정들을 함께 마주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며 "영화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기억의 산물이라면 슬픈 기억을 어떻게 다루면서 나아갈 수 있는지와 연결돼 있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영화 '애플' 흐리스토스 니코우 감독 "인간은 기억의 산물"

이런 점에서 영화 속 독특한 성격의 안나는 기억을 잃고 사라진 감정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통해 급속도로 친해지고 서로를 의지하게 되지만, 한순간 관계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두 사람은 미션을 함께 수행해가며 관계를 발전시켜요.

안나가 알리스보다 프로그램을 선행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알리스는 안나가 어떻게든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돼요.

알리스에게 안나는 처음에는 새로운 미래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반성하고 이해하게 하도록 하는 역할을 해요.

"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 감정, 관계 등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8년이 걸렸다.

니코우 감독은 제작 단계에서 기억상실증이 바이러스처럼 퍼진다는 부조리한 세계관을 담은 대본으로 자금 투자를 받는 데 어려움이 컸다고 밝혔다.

영화 '애플' 흐리스토스 니코우 감독 "인간은 기억의 산물"

완성된 영화는 할리우드 배우이자 제작사 더티 필름을 설립한 케이트 블란쳇이 책임 프로듀서로 참여하면서 더 큰 주목을 받았다.

제77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이었던 케이트 블란쳇은 영화 시사 후 니코우 감독에게 미팅을 요청했고, 해외시장 진출을 도왔다.

니코우 감독은 "케이트 블란쳇은 훌륭한 제작자"라며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아주 많은 열정을 갖고 있었고, '애플'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함께 해줬다"고 전했다.

케이트 블란쳇은 니코우 감독의 차기작 '핑거네일' 제작에도 참여하기로 했다.

'핑거네일'은 사랑에 빠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작품이다.

니코우 감독은 "'애플'과 매우 유사한 느낌의 작품으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매우 간단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고 차기작을 소개했다.

영화 '애플' 흐리스토스 니코우 감독 "인간은 기억의 산물"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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