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다는 이유로 자식들 빼앗긴 아버지의 세상을 향한 투쟁
빈곤과 어설픈 사회안전망…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아버지의길'
플라스틱 물병을 든 초췌한 얼굴의 남자가 길을 걸어간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아들과 딸을 지역 복지센터에 뺏긴 아버지, 그는 자식들을 되찾기 위해 고단한 여정을 이어간다.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슬로단 고르보비치 감독의 '아버지의 길'은 빈곤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한 가장이 불합리한 사회에 조용하지만 강인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세르비아의 작은 마을에 사는 두 아이의 아버지 니콜라는 가난의 굴레에서 허덕이는 일용직 노동자다.

집에는 전기와 수도가 끊긴 지 오래고, 가족들은 굶주림에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니콜라 가족이 겪고 있는 빈곤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니콜라의 아내는 체불된 임금을 달라며 니콜라의 직장에 찾아와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불을 붙인다.

다행히 아내는 목숨을 건지지만, 옆에서 이를 보던 아이들은 복지센터로 넘겨진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니콜라는 아이들을 돌려달라고 호소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사회 안전망은 가난한 부모를 자식을 돌볼 능력이 없는 부모로 치부해버린다.

여기에는 아이를 볼모로 지원금을 챙기는 부패한 관료도 개입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빈곤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개인에게 떠넘겨진다.

빈곤과 어설픈 사회안전망…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아버지의길'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니콜라는 마을에서 300㎞ 떨어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복지부 장관을 만나 이의 신청을 하겠다며 차비도 없이 집을 나선다.

수돗물로 채운 물통과 밤에 덮고 잘 담요 한 장, 허기를 채울 빵 쪼가리 조금이 그가 가진 전부다.

카메라는 니콜라의 여정을 차분하게 뒤따라간다.

지칠 대로 지친 뒤에야 물과 빵으로 허기를 달래고, 추위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길바닥에서 잠든 모습이 되풀이된다.

이 거친 여정을 이어가는 니콜라는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는 형벌을 받는 듯한 모습이다.

영화는 별다른 배경음악이나 대사 없이 청각적인 요소로 니콜라가 걸어가는 길의 험난함과 외로움을 극대화한다.

니콜라 옆을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는 너무 커서 위협적이고, 그가 힘겹게 내딛는 발걸음과 내뱉는 호흡 소리는 암담한 현실만큼이나 무겁다.

니콜라는 탈진해서 쓰러지고, 물집이 터져 피가 나는 발가락 때문에 절뚝거리면서도 계속 걷는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걷기만 한 탓에 그의 몸은 점점 쇠약해지지만 멈추지 않는다.

걷는 것은 니콜라가 아이들을 되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빈곤은 개인의 힘만으로는 벗어나기 불가능하다.

그래서 니콜라의 모습은 무모하다기보다는 씁쓸하게 다가온다.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에게 안전망이 돼줘야 할 복지제도는 '아이들에게 가난은 폭력'이라는 어설픈 잣대로 잔인함을 드러낸다.

빈곤과 어설픈 사회안전망…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아버지의길'
꼬박 닷새를 걸어 도착한 베오그라드에서 니콜라는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영화에는 그의 처지에 공감하고 온정을 베푼 사람들도 등장한다.

안타까운 사연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세간의 이목도 받고, 니콜라는 복지부의 고위직 관료도 직접 대면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현실을 바꿀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영화 곳곳에는 오랜 분쟁으로 양극화가 심해진 세르비아의 현실도 담겨있다.

수도와 전기가 끊길 정도로 가난한 시골과 높은 건물과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의 명암은 영화 후반부 극대화된다.

소외계층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보여주기식 행정도 넌지시 꼬집는다.

슬로단 고르보비치 감독은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출생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던 '빗나간 과녁'(2001)을 비롯해 '트랩'(2007), '써클즈'(2013) 등 전작에서도 고국의 사회상을 반영해왔다.

이번 영화는 그의 네 번째 작품으로 가난해서 아무런 힘이 없는 아버지가 사회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통해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영화는 다음 달 8일까지 진행되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며,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웨이브에서도 관람할 수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