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말 악보처럼 억양 연습…14년차 배우, 이제 한 단계 넘어"

"진아를 만나고 배우로서 힘을 얻었어요.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어떤 식으로든 진아를 통해 이런 마음을 느낄 수 있길 바라며 연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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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터' 임성미 "영화 속 진아 만난 뒤 배우로서 단단해졌죠"
최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임성미(35)는 전반적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영화 '파이터'에서 연기한 '진아'처럼 화장기 없는 얼굴로 수수하면서도 아이 같은 순수함을 간직한 배우 같다는 인상을 줬다.

'파이터'는 식당의 허드렛일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탈북민 진아가 복싱을 시작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좀처럼 감정표현 없이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지려 하는 진아의 응축된 심리를 따라가는 성장 드라마다.

영화의 중심축인 진아 역을 맡은 임성미는 올해로 14년 차 배우다.

연극,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지만, 장편영화의 주연을 꿰찬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이 영화로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안기도 했다.

배우로서 영화계 내에서 인정받는 대열에 합류한 셈이다.

여기에 더해 '파이터'가 제71회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분에 초청되면서 더 주목받았다.

'파이터' 임성미 "영화 속 진아 만난 뒤 배우로서 단단해졌죠"
그는 이런 관심이 그저 고맙다고 했다.

지금은 영화계 안팎으로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칭찬을 달고 다니지만, 사실 그간의 연기 생활은 무명에 가까웠다.

소속사 없이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그에게는 배역을 따내는 일 자체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다만 그 시간을 즐긴 것이 배우로서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대학교 졸업 이후 전공 분야로 나가는 게 맞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어요.

여행을 많이 다녔고, 다른 것들을 많이 시도했어요.

20대였고, 부모님이 지원해준 덕분이었죠. 산티아고 순례길 800㎞를 한 달 넘게 걸었어요.

당시에는 나쁜 딸이었죠. 그래도 그때 고집을 부려서 앞으로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요.

부모님도 뿌듯해하실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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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미는 이런 점에서 영화 속 진아의 모습이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다고 했다.

탈북민인 진아는 사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방황하는데, 자신도 연기자지만 배역이 없을 때는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붕 떠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는 "깊이는 다를 수 있지만, 진아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있었다"고 말했다.

'파이터' 임성미 "영화 속 진아 만난 뒤 배우로서 단단해졌죠"
영화를 찍으며 캐릭터인 진아에게서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다고 했다.

임성미는 "진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속은 여린 '내유외강'이었는데 겉과 속이 모두 강한 '내강외강'인 진아를 만나고서 변했다"며 "우선 배우로서 더 단단해졌다.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거나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대해 개인적으로 많이 되짚어보게 해 준 캐릭터"라고 애착을 드러냈다.

물론 탈북민을 연기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가장 먼저 부딪힌 벽은 언어였다.

사투리 연기를 해본 적은 있지만, 북한말은 차원이 달랐다고 했다.

어떻게 연습했냐는 질문에 임성미는 자신의 대사에 억양의 높낮이를 표시해 둔 대본집을 내밀었다.

부동산 매니저로 출연하는 연변 출신의 이문빈 배우에게 집중 코치를 받으며 적어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마치 악보를 그리듯이 연습했다"고 전했다.

언어 외에도 임성미는 복싱선수인 진아를 연기하기 위해 촬영 직전 한 달 넘게 눈을 뜨면 체육관에서 훈련을 하는 '체육인' 같은 삶을 살았다.

그렇게 외형적인 진아의 모습을 완성해갔지만 가장 어려운 부분은 정서적인 부분이었다고 했다.

"진아가 어떤 감정일 것이라고 정의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진아는 먼저 남한으로 건너간 엄마, 부동산 매니저, 관장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데 분명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 같았어요.

진아는 이방인이지만, 머리색이나 피부색이 다르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깊은 고민을 했을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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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터' 임성미 "영화 속 진아 만난 뒤 배우로서 단단해졌죠"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거쳐 링 위에 선 진아는 복싱을 통해 세상에 한 걸음을 내디딘다.

혼자 방 안에서 울음을 꾹꾹 참아내던 진아는 어느덧 관장과 코치 앞에서 엉엉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마음을 내보인다.

임성미는 이런 진아의 모습이 새로운 곳에서 스스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해석했다.

"진아는 복싱을 준비하면서 엄마에 대한 그리움, 원망을 툭툭 털어냈을 것 같아요.

꼭 복싱이 아니었더라도 지니고 있던 상처들을 털어낼 수 있는 수단을 찾았겠죠. 이런 과정을 통해 진아는 처음에는 시야가 좁은 경주마였다면 이제는 목장에서 좀 더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진 말이 된 것 같아요.

마음을 내 줄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거죠. 관장과 코치와도 유대감을 쌓고 엄마에 대해서도 완전한 용서는 아니지만, 조금은 마음을 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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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미는 진아가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처럼, 자신도 배우로서 이제 막 한 단계를 마치고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연기자로서 1점부터 10점까지 점수를 준다면 저는 아직 2점 정도인 것 같아요.

1은 지난 14년에 대한 점수라고 보고요.

'파이터'란 작품을 통해 이제 2점대에 들어섰고, 앞으로 더 나아가야죠. 앞으로 하고 싶은 역할과 장르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요.

무엇보다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나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비교 대상이 아예 없는 캐릭터가 되는 거죠."
'파이터' 임성미 "영화 속 진아 만난 뒤 배우로서 단단해졌죠"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