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영화제 수상에도…'여성의 도구화'·'미투' 논란
달시 파켓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면 그를 기리는 건 잘못"

여배우 성폭행 혐의로 소송 중인 김기덕 감독이 해외 체류 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후 그의 영화와 행보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미투' 논란 이후 김 감독과 등을 돌린 국내 영화계가 그의 부고에도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는 가운데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한 이력 등을 이유로 그를 추모하는 일부 논의에 선을 그은 건 국내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평론가들이다.

작품 안팎에서 논란 끊이지 않았던 김기덕 감독
데뷔작 '악어'(1996) 이후 김 감독의 작품 대부분은 전통적인 영화 작법에서 벗어나 있다.

부랑아, 깡패, 사형수, 성매매 여성 등 밑바닥 인생을 사는 인물들의 극단적인 폭력과 성폭행, 엽기적인 행각과 변태적인 심리를 거칠게 그려냈다.

유럽에서는 이를 '강렬하고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인 지지자들이 생겨났고, 김 감독은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 3대 영화제의 단골 인사가 됐다.

반면 여성을 중심으로 한 많은 일반 관객에게는 남성의 시각에서 여성을 도구화하며 지나치게 폭력적인 영화가 불쾌함과 고통을 자극하며 외면받았다.

김 감독은 '미투' 가해자로 지목된 이후 "영화가 폭력적이라도 제 삶은 그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잇따른 피해자들의 추가 폭로는 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현장 역시 폭력적이었다고 증언했다.

그의 영화 중 처음으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나쁜 남자'(2002)는 사창가의 깡패가 우연히 마주친 대학생에게 홧김에 키스하고, 계략을 꾸며 사창가로 끌어들인다는 내용이다.

심지어 절망과 치욕에 길든 대학생이 깡패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결말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대학생을 연기한 배우는 인터뷰에서 촬영 당시를 "악몽이었다", "영혼을 다쳤다"는 말로 표현했고, 이 작품으로 신인상을 받기도 했지만, 이듬해 모든 연기 활동을 중단했다.

한국과 일본의 스타 배우인 이나영과 오다기리 조가 주연한 '비몽'(2008) 촬영 당시에는 이나영이 목을 매는 장면을 촬영하다 실제 기절하며 죽을 뻔한 사고가 나기도 했다.

이후 김 감독은 3년 동안 칩거하며 홀로 만든 '아리랑'(2011)으로 칸국제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제자인 유명 감독을 비롯한 지인들을 "배신자들, 쓰레기들" 같은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비난하고 권총을 직접 만들어 상대를 죽이러 가는 잔혹한 행위까지 담아 논란을 일으켰다.

작품 안팎에서 논란 끊이지 않았던 김기덕 감독
'뫼비우스'(2013)는 성기 절단, 근친상간 등 극단적인 묘사로 실질적인 상영 금지조치에 해당하는 '제한 상영가' 판정을 받으며 심의 논란을 가열시켰다.

영화는 두 차례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았다가 2분 30초가량을 잘라낸 뒤 세 번째 심의에서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고 개봉했다.

당시 제작자와 감독들은 국가의 검열을 반대한다며 김 감독 편에 서기도 했지만, 결국 이 영화는 김 감독과 국내 영화계가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된다.

2017년 이 영화에 출연했던 여배우 A씨가 촬영 당시 김 감독으로부터 연기 지도라는 명목으로 뺨을 맞고 폭언을 들었으며 대본에 없는 베드신 촬영을 강요했다며 검찰에 고소하면서 이듬해까지 김 감독에 대한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폭로가 이어졌다.

'반복되는 성관계 요구를 거부해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합숙 촬영 중 김 감독과 배우 조재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옷 안으로 손을 넣어 몸을 주무르고 강제 키스까지 했다', '조재현에게 화장실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증언들이었다.

김 감독은 A씨와 이를 보도한 MBC를 상대로 무고와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했지만 모두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고 김 감독은 다시 A씨와 MBC를 상대로 1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면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당시 여성 단체들은 물론, 대부분의 주요 영화단체들까지 성명을 내고 "2차 가해를 중단하고 자성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인정받는 감독이었기에 외신들도 김 감독의 미투 파문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할리우드리포터는 당시 "김기덕의 혐의는 최근 일련의 '미투' 폭로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것"이라고 전했다.

'기생충'을 비롯해 수많은 한국 영화 영어 자막을 번역한 평론가 달시 파켓은 12일 자신의 SNS에 "2018년 김기독 감독의 성폭력 의혹을 다룬 프로그램이 방영된 이후 수업에서 김기덕 영화를 가르치지 않는다"며 "누군가 실생활에서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면 그를 기리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적었다.

또 "그가 천재인지 아닌지 신경 쓰지 않는다.

또 천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영국 출신의 평론가이자 이경미 감독의 남편인 피어스 콘란도 자신의 SNS를 통해 "김 감독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고인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며 "그가 촬영장에서 저지른 끔찍한 행동에 대한 언급 없이 위대한 예술가가 죽은 것에 대해 (대부분 서양에서) 애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슬펐다"고 밝혔다.

그는 "영화계에 대한 그의 공헌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지만, 그의 괴물 같은 성폭력의 희생자들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영화평론가 박우성도 SNS에서 "대개의 죽음은 애도의 대상이지만 어떤 경우 그것은 또 다른 가해가 된다"며 "사과는커녕 명예가 훼손당했다며 피해자를 이중으로 괴롭힌 가해자의 죽음을 애도할 여유는 없다.

명복을 빌지 않는 것이 윤리다"라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