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세대 펑크록밴드 "기교나 허세 없는 게 사랑받는 이유인 듯"
"공연하는 게 노는 것 같아…이쯤 하니 나 자신 대견하기도"
크라잉넛 "얇고 길게 음악 해온 25년…'그래도 잘했네' 싶어요"

펑크 음악을 오래 하면 사람이 맑아지는 걸까.

영화 '매드맥스' 악당 임모탄의 군대 선봉에서 거칠게 기타 줄을 뜯으며 모래바람을 맞는 '기타맨' 같을 거라 상상했다.

그러나 실제로 본 펑크록 밴드 크라잉넛은 해맑고 수줍음 많은 아이 같았다.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연습실에서 만난 이들은 "무대 위에서 그렇게 논다고 해서 밖에서도 그러면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꼴이겠냐"며 웃었다.

박윤식(메인보컬·기타), 이상면(기타), 한경록(베이스), 이상혁(드럼), 김인수(아코디언·키보드)로 구성된 크라잉넛은 올해로 활동 25주년을 맞은 국내 1세대 펑크록 밴드다.

1995년 홍대 클럽 '드럭'에서 공연하기 시작해 이듬해 드럭이 제작한 편집앨범 '아워 네이션 1'(Our Nation 1)으로 데뷔했다.

"'슈가맨' 같은 방송을 보면 우리보다 한참 나중에 음악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저희는 그래도 멤버 변화 없이 꾸준히 지금까지 음악을 하고 있잖아요.

'이만하면 잘했다, 그래도 잘했네'라는 생각이 들어요.

"(박윤식)
크라잉넛 "얇고 길게 음악 해온 25년…'그래도 잘했네' 싶어요"

크라잉넛은 지금까지 여덟장의 정규앨범을 비롯해 미니앨범(EP) 등 음반 수십장을 발표했다.

그간 걸어온 발자취를 모아 오는 8월 열여섯곡이 담긴 베스트앨범을 발표하고 25일에는 수록곡 '좋지 아니한가'를 선공개한다.

"이전 음반을 들으면 '나 왜 이렇게 연주를 못 했지?'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이번 기회에 실제로 공연에서 하듯이 옛 노래들을 새롭게 녹음해 앨범에 담았어요.

"(한경록)
박윤식은 "옛날에는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잘 몰랐다"며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다 죽여버릴 거야'하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박윤식은 기교가 없는 게 크라잉넛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인 것 같다고 자평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말달리자'나 '룩셈부르크' 등 멜로디가 복잡하지 않고 소리를 내지르는 크라잉넛 노래는 많은 이에게 '노래방 피날레 곡'으로 꼽힌다.

가사 또한 '날 것' 같으면서도 서정적이다.

지친 청춘에게 '닥치고 내 말 들어 / 우리는 달려야 해'(말달리자)라고 일갈하는가 하면 '부어라 마셔라 춤을 춰라 / 우리의 인생이 여기까지인 듯'(내 인생 마지막 토요일)이라며 같이 놀자고 외친다.

'방황하며 춤을 추는 불빛들 / 이 밤에 취해 흔들리고 있네요'(밤이 깊었네) 같은 시적인 가사와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 나의 궁전으로'(명동콜링)처럼 애절한 노랫말도 눈에 띈다.

크라잉넛 "얇고 길게 음악 해온 25년…'그래도 잘했네' 싶어요"

"뭐랄까.

저희는 허세가 없어요.

요즘 세대들이 말하는 '스웩∼'이요.

자기를 과장해서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거 같은데 저흰 그런 게 없고, 또 없고 싶어요.

"(이상면)
기교도, 스웨그(swag)도 없다는 이들은 음악의 방향성도 딱히 없다고 했다.

이상혁은 이같이 말하면서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가 계속 바뀐다.

노래를 만들 당시에 느낀 것들을 음악으로 담는다"고 했다.

그래도 "아직 음악이 제일 재밌다"고 말하는 크라잉넛에게 '열정'만큼은 넘칠 만큼 있는 듯하다.

"음악 처음 시작했을 때랑 똑같이 지금도 무대에 서는 게 제일 재밌고 설레요.

외모는 늙었겠지만요(웃음). 멤버 모두가 공연하는 게 노는 거 같다고 생각해요.

"(한경록)
지난 25년간 수많은 무대를 거친 이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무엇이었을까.

멤버들은 입을 모아 1996년 '스트리트 펑크쇼'와 2007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라고 답했다.

"'스트리트 펑크쇼'는 드럭을 벗어나서 한 첫 야외공연이었어요.

홍대 거리, 명동 거리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어우러져서 같이 그냥 놀았어요.

다이빙도 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너무 흥분해서 무대 장치를 부수더라고요.

다들 놀고 싶은 갈증 같은 게 있었던 거죠"(박윤식)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서는 배를 채우던 관객 수백명이 크라잉넛의 '말달리자' 전주가 나오는 걸 듣고는 양손에 핫도그와 맥주를 든 채 무대를 향해 뛰어왔다고 한다.

이상혁은 "백만대군이 쳐들어오는 것 같았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크라잉넛 "얇고 길게 음악 해온 25년…'그래도 잘했네' 싶어요"

한 시간 반 동안의 인터뷰에서 지난 25년 세월을 되돌아본 이들의 표정에선 뿌듯함이 엿보였다.

"20주년 때는 '밥 먹고, 잘 자고, 살다 보면 그까짓 거 후딱 가는 거지'하고 생각했어요.

근데 나이가 들다 보니 그 5년이 참 힘들더라고. 이 정도 하니까 드디어 저 자신이 대견해졌어요.

"(김인수)
이상혁은 "우리 모토가 '얇고 길게 가자'다"라며 "어느 정도 얇고 길게 25년간 음악을 한 거 같은데 앞으로도 오래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10년을 넘기는 밴드가 잘 없는 와중에 저희가 25년간 해왔다는 건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해요.

후배들이 보고 '저 형들처럼 되면 좋겠다'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수영하다 보면 25m 지점에서 '턴'을 하면서 도움닫기를 하잖아요.

저희도 이번 25주년으로 그런 추진력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경록)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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