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영화 기행

125년 영화사의 시작은 유럽이었지만, 20세기 이후 영화산업의 중심은 단연 이곳, 로스앤젤레스다.

90년을 넘긴 아카데미 시상식은 바로 그 상징.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기생충'이 걸린 돌비 극장에서부터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봤다.

[영화의 영화] '오스카'를 찾아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요 부문인 '빅5' 중 남녀 주연상을 뺀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에 더해 국제 영화상까지 4관왕을 차지하며 한국은 물론 아카데미와 세계 영화사를 다시 썼다.

봉 감독이 지적한 대로 아카데미는 칸 영화제 등과 달리 미국의 '지역'(local) 영화 시상식일 뿐이지만, 할리우드가 전 세계 영화산업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단연 그 이상이다.

◇ 역사적인 아카데미 시상식장들
변방국가의 감독이 미국 최고 권위의 아카데미를 휩쓴 이번 아카데미의 흥분과 열기가 아직 다 가시지 않은 2월 말, 돌비 극장 앞은 언제나처럼 인파로 북적였다.

할리우드대로 명예의 거리(walk of fame)에 이름을 새긴 스타는 2천500명이 넘는데, 돌비 극장 바로 앞에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이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시상식 때 수많은 스타가 밟는 레드 카펫이 깔렸던 극장 입구부터 중앙 계단까지 이어지는 홀 양쪽 기둥에는 역대 작품상 수상작의 제목이 새겨져 있다.

'기생충'은 중앙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바로 옆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기 좋은 위치에 있다.

돌비 극장에서는 설립 이듬해인 2002년부터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고 있다.

설립 당시에는 '코닥 극장'이었지만 2012년 코닥이 파산한 이후 돌비에 매각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영화의 영화] '오스카'를 찾아서

돌비 극장 바로 옆 '기생충' 포스터가 걸려 있는 TCL 차이니즈 극장 역시 1944년부터 1946년까지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던 곳이다.

특히 1944년 제16회 시상식은 큰 규모의 공공장소에서 열린 첫 번째 시상식이었고,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카사블랑카'가 작품상을 받았다.

1927년 세실 B. 데빌 감독의 '왕중왕' 시사회와 함께 문을 연 이 극장의 이름은 건립자 이름을 딴 그래우만 차이니즈 극장이었다.

중국의 거대한 탑을 모티브로 디자인된 극장은 기둥 중간에 돌로 조각된 9m 높이의 용이 장식돼 있다.

지금은 전 세계 배우들의 핸드 프린트와 풋 프린트, 친필 서명이 가득한 앞마당은 물론, 세계 최대의 아이맥스 상영관으로 유명하다.

[영화의 영화] '오스카'를 찾아서

◇ 호텔에서 열린 친교 모임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1929년 차이니즈 극장 맞은편에 있는 할리우드 루스벨트 호텔에서 조촐한 만찬 행사로 이뤄졌다.

영화 관계자 270명이 행사 관람과 저녁 식사를 위해 5달러를 내고 입장했고, 1927∼1928년 제작된 영화를 대상으로 심사해 선정한 작품에 트로피를 수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5분이었다.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함께한 것은 다운타운의 두 호텔이다.

1930년부터 1940년대 초까지 밀레니엄 빌트모어 호텔과 현재 철거되고 없는 앰배서더 호텔 두 곳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영화산업이 번성하기 시작하던 1923년 오픈한 빌트모어 호텔은 인테리어에만 1천800만달러가 들어갈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졌고, 당대의 영화인과 유명인들이 드나들었다.

1931년, 1935∼1939년, 1941∼1942년 등 총 8번의 아카데미 시상식이 이곳에서 열렸다.

[영화의 영화] '오스카'를 찾아서

아카데미 시상식을 주최하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AMPAS)가 설립된 곳도 여기다.

거물 제작자였던 MGM의 루이스 B. 메이어 등 영화인들은 1927년 크리스털 볼룸에서 AMPAS를 발족시켰다.

당시 현장에서 MGM의 아트 디렉터인 세드릭 기븐스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오스카상 트로피 스케치가 냅킨에 남아 있는데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냅킨에는 트로피 스케치 옆에 '오스카'라고 적혀 있어 그 별명이 1930년대 이후 붙여졌다는 설과도 맞지 않는다.

호텔 메인층 복도에 이 냅킨 스케치를 비롯해 배우로서 시상식에 참석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모습 등 아카데미와 관련한 흥미롭고 역사적인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규모가 커지면서 시상식은 다른 호텔과 극장으로 옮겨 열렸지만, 빌트모어 호텔은 여전히 많은 영화와 드라마, 뮤직비디오의 단골 촬영 장소다.

G층 로비인 랑데부 코트에서 제니퍼 로페즈와 테일러 스위프트, 존 레전드, 에드 시런의 뮤직비디오와 영화 '고스트버스터즈' 등 일부 작품의 해당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또 196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존 F. 케네디 민주당 후보가 이 호텔 뮤직룸(현재 메인 로비)에 선거운동본부를 차리기도 했다.

1964년 첫 미국 투어로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선두에 섰던 비틀스는 호텔 주변을 가득 메운 팬들 때문에 헬리콥터를 타고 옥상에 내려 프레지덴셜 스위트에 묵었다.

골드룸 안쪽 피아노 뒤편 비밀 통로를 통해 입장하는 스피크이지(speakeasy) 바는 금주령 시대 유명인사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라고 한다.

[영화의 영화] '오스카'를 찾아서

◇ 오스카를 오스카라고 부른 이는
아카데미상의 또 다른 이름은 '오스카'(Oscar)상이다.

아카데미 수상자에게 주는 높이 34㎝, 무게 3.8∼3.9㎏의 황금빛 남성상 트로피를 오스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그중 아카데미 도서관 사서였다가 훗날 고위직까지 오른 마거릿 헤릭 여사가 초보 사서 시절 도서관 책상 위에 있는 황금상을 보고 자신의 삼촌 오스카와 닮았다고 말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아카데미에서 마거릿 헤릭 여사의 위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AMPAS 설립 이듬해인 1928년 루스벨트 호텔에 만들어졌던 아카데미 도서관은 1971년 베벌리 힐스 지역의 현재 위치로 옮겨 오면서 같은 해 퇴임한 마거릿 헤릭을 기려 이름을 마거릿 헤릭 도서관(Margaret Herrick Library)으로 바꿨다.

'오스카'를 직접 만져볼 기회도 있었다.

도서관이 보관하고 있는 오스카 트로피는 조지 루커스가 1992년 받은 어빙 G. 솔버그 기념상이었다.

1930년대 초 할리우드를 견인했던 제작자 어빙 솔버그를 기념해 만든 특별상으로, 1937년부터 영화산업에 기여한 프로듀서에게 주고 있다.

4㎏에 가까운 트로피는 한 손으로 들고 있기에는 꽤 묵직했다.

봉 감독처럼 트로피 네 개를 한 손에 두 개씩 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영화의 영화] '오스카'를 찾아서

◇ 아카데미, 그리고 영화의 모든 것
도서관을 찾은 날 로비에서는 여성 영화인들을 기리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아녜스 바르다부터 캐스린 비글로, 그레타 거윅 같은 유명 감독뿐 아니라, 의상 디자이너, 미술감독, 편집 기사, 각본가, 프로듀서, 애니메이터 등 대중에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모든 분야의 여성 영화인들을 아우른다.

지난해 별세한 바르다 감독의 입상과 대형 사진이 유독 많다 싶더니, 담당 책임자가 "제가 팬이라서…"라고 수줍게 밝혔다.

도서관은 역대 아카데미 관련 자료를 보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 전문 도서관이기도 하다.

[영화의 영화] '오스카'를 찾아서

영화 스틸뿐만 아니라 비하인드 신, 메이크업 장면 등 1천300만 장에 달하는 사진 자료를 보유하고 이를 디지털화하고 있다.

네거티브 필름, 흑백 사진 등 다양한 버전이 있고 연도별, 작품별, 인물별, 제작사별로 구분돼 있다.

또 6만4천 장의 포스터와 영화 의상 스케치, 스토리보드 등 온갖 영화 제작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기생충'의 국가별 포스터는 물론, 국내에서는 본 적 없는 버전의 '괴물' 포스터도 있었다.

각국 영화 관계자들이 주고받은 서신과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릿(비비언 리)이 착용했던 브로치, 배우들의 캐스팅 사진과 캐스팅 감독의 캐스팅 노트, '오즈의 마법사'의 사자 가면, 히치콕 감독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촬영 현장 메모 등도 특별 소장품실에서 볼 수 있었다.

도서관은 일주일에 나흘(월·화·목·금) 문을 연다.

로비의 특별전시와 2층 도서 열람실의 책은 자유롭게 볼 수 있고, 보관실에 있는 일부 자료는 따로 신청해야 한다.

영화학도와 마니아의 성지인 마거릿 헤릭 도서관의 희귀하고 흥미로운 자료들은 올해 12월 14일 로스앤젤레스 뮤지엄(LACMA) 바로 옆에 아카데미 뮤지엄이 문을 열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게 된다.

[영화의 영화] '오스카'를 찾아서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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