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여성들이 있다.

이태원이 용산 미군의 기지촌이었던 만큼, 이들은 미군을 상대로 돈을 벌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이태원의 여성들은 '양공주'라는 낙인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미군 부대가 이전하고 이태원이 '가장 힙한 동네'로 변신한 지금, 그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영화 속 그곳] 이태원을 떠나지 못하는 여성들
강유가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이태원'은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태원에서 살아온 삼숙, 나키, 영화 세 여성의 이야기다.

많은 여성이 미군과 결혼해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고,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이태원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 삼숙·나키·영화
이제 77세가 된 삼숙. 40년간 이태원에서 미군 전용 컨트리클럽인 '그랜드 올 아프리'(Grand Ole Opry)를 운영하고 있다.

열다섯살 때부터 생선을 팔아 가족을 부양한 그는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만 들어도 헤쳐온 풍파를 짐작하게 하는 여장부다.

결혼한 미국인 남편이 죽고 지금은 혼자서 쇠락해가는 클럽을 지키고 있다.

미군 남편과 걸어가다 "늙은 양갈보도 있네"라는 조롱에도 그는 화내지 않았다.

"왜냐, 나는 아니니까"
[영화 속 그곳] 이태원을 떠나지 못하는 여성들
나키는 75세다.

젊어서 주먹을 휘두르는 남편과 이혼하고 미군 클럽에서 웨이트리스 생활을 시작했다.

화려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지금은 음식점 설거지 등으로 생계를 잇는다.

그럼에도 "다 내 탓이지"라며 세월을 원망하지 않는다.

이태원역 화장실에서 휴지를 둘둘 말아 가지고 온 그는 "나는 이태원에서 큰 역할을 했으니까 이태원 화장실은 내 집 화장실과 똑같애"라며 웃는다.

불교 방송을 틀어놓고 마음의 안정을 찾지만, 아직도 페디큐어를 하고 속눈썹을 붙이며 멋을 낸다.

58세인 영화는 이태원 클럽에서 일하다가 미군과 결혼했지만, 미국에 간 지 1년 만에 돌아왔다.

세상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듯한 표정에 연신 담배를 피워댄다.

똑같이 미군과 결혼한 여동생은 생사도 모른 채 연락 두절이다.

초등학생 조카와 둘이 사는 그는 남동생이 중국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로 근근이 연명한다.

[영화 속 그곳] 이태원을 떠나지 못하는 여성들
영화는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말한다.

"후회는 없어. 미국까지 갔다 왔는데 뭐. 내 신조가 뭔 줄 알아? 내가 화류계 생활은 했지만, 미국은 꼭 갔다 온다 그거였어."
세 여성은 당연한 여성의 권리를 내세울 만한 시대도, 공간도 아닌 상황에서 팍팍한 삶을 짊어지고 왔지만, 누구 하나 '나는 피해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감독도 애써 그걸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저 40년이 넘도록 이태원이라는 곳에서 살아온 그들의 삶을 옆에서 조용히 들여다 볼 뿐이다.

[영화 속 그곳] 이태원을 떠나지 못하는 여성들
◇ 李泰院→異胎院→梨泰院
세 여성의 삶만큼이나 이태원의 역사도 굴곡져 있다.

이태원의 지명은 조선 시대 때 여행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원(院,여관)이 있던 것에서 유래했다.

'용재총화'에 따르면 당시 이곳을 지금의 배 이(梨)가 아닌 오얏 이(李)를 써 '李泰院'이라 표기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들이 여승들만 있던 운종사를 점거하고 승려들을 겁탈해 많은 혼혈아가 태어났다.

나라에서 이곳에 다른 씨앗이 잉태됐다는 뜻에서 '異胎院'이라는 보육원을 둬 혼혈아들을 돌보게 한 것이 이태원의 또다른 한자 표기를 낳게 됐다.

이후 이태원에는 귀화한 왜인들이 집단을 이뤄 살았다 하여 이타방(異他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효종 때 이런 명칭이 치욕스럽다고 하여 배나무를 많이 심고 지금의 '梨泰院'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화 속 그곳] 이태원을 떠나지 못하는 여성들
이태원의 이국적 색채는 해방 후 미군의 주둔으로 더 짙어졌다.

1970년대 들어 미군 대상 유흥업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이태원에는 '후커힐'이라는 거리가 형성됐다.

내국인은 출입이 제한된 이곳에서 많은 여성이 돈을 벌었고, 꿈에 그렸던 국제결혼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미군은 떠나고 뉴타운 지정, 재개발 소식에 땅값이 들썩였다.

이태원은 지금 다국적 레스토랑과 다양한 인종, 첨단 패션이 자리 잡은 청춘들의 '핫 플레이스'다.

[영화 속 그곳] 이태원을 떠나지 못하는 여성들
◇ 잊히지 않기 위하여
삼숙·나키·영화 세 여성의 과거와 현재는 그 자체로 이태원이라는 공간의 역사다.

피해자이든 아니든, 그들의 삶이 가치 있든 아니든, 이들은 이태원이라는 공간의 역사를 얼마간 점유해 왔다.

곱지 않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랑하고 싶진 않아도 스스로 선택한 삶을 책임지며 당당하게 살아왔다.

그럼에도 포털 사이트에서 '이태원'을 치면 웹툰과 TV 드라마인 '이태원 클라쓰'로 도배되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클라쓰'가 이태원을 지배하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게 바뀌어만 가는, '힙'하고 '핫'해진 이태원의 현실에서 세 여성의 이곳 생활은 갈수록 버겁기만 하다.

[영화 속 그곳] 이태원을 떠나지 못하는 여성들
삼숙은 무조건 헐고 다시 높게 짓는 한국의 재개발에 대해 "미국 사람들은 새 거 좋아 안 해. 역사적인 거 좋아하지"라고 말해 보지만, 잊혀가는 옛 이태원과 희미해져 가는 인생에 대한 회한으로 들릴 뿐이다.

먹고 사는 것도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자본의 논리에 사람들은 밀려나고, 그에 떠밀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나키의 말대로 '젊은이들이 땅이 꺼지도록 모여드는' 이태원에 이들을 위한 확실한 미래는 없다.

이 영화는 사람이 공간의 역사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태원에서 살아온 여성들이 잊힌다는 것은, 이태원의 그 오랜 이국(異國)의 역사를 잊는 것과 같다고.
영화는 그래서, 변해가는 이태원의 모습보다 어쩌면 더 빠르게 배제되고, 삭제되고, 망각되어 가는 여성들의 삶을 우리 기억의 한켠에 소환하기 위한 작은 노력이다.

[영화 속 그곳] 이태원을 떠나지 못하는 여성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