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로치의 '미안해요 리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평생 스크린에 담아온 거장 켄 로치가 이번에는 택배 기사와 돌봄 노동자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칸영화제 두 번째 그랑프리를 거머쥐었고, 80대 중반의 나이에 은퇴도 고려했지만, 아직도 그에겐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에서 이 노감독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겨냥한다.

영화엔 산업기술의 혁신이 가져온 새로운 형태의 착취를 조명하지 않고는 메가폰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단호함이 있다.

그는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영화 속 그곳] 뉴캐슬과 '플랫폼 노동'

◇ 허울 좋은 '자영업자'
금융위기로 실직한 뒤 막노동 일을 전전하던 리키는 택배 기사로 일하는 친구를 보고 솔깃했다.

택배가 일한 만큼 벌 수 있는 자영업이라는 점에서다.

열심히 일하면 금방 돈을 모아 집도 살 수 있으리라. 그는 아내 애비가 돌봄노동을 위해 출근용으로 쓰던 차를 팔아 택배용 밴을 장만한다.

그러나 리키가 예상했던 택배 수입은 하루 14시간씩 주 6일을, 밥 먹을 시간도,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쳇바퀴 다람쥐처럼 일해야 벌까 말까 한 돈이었다.

구입한 차 할부금, 교통 범칙금, 배송 물건의 도난이나 분실에 따른 배상 등 부대 비용과 위험은 모두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자녀에게 문제가 터져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이 아파도, 리키에게는 단 하루의 휴가를 내는 게 너무 어려운 일이 돼버렸다.

[영화 속 그곳] 뉴캐슬과 '플랫폼 노동'

리키의 아내 애비는 요양보호사다.

이곳저곳의 환자에게 달려가기 위해 24시간 대기한다.

하루에 여러 가정을 차례로 방문해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씻기고 먹인다.

강도 높은 감정노동을 이겨내야 한다.

남편의 밴을 사기 위해 차를 팔게 된 애비는 뚜벅이 신세가 되고 퇴근 시간은 더 늦어진다.

가사노동과 아이들 관리까지 애비의 몫이다.

자녀들도 위태롭다.

어린 딸은 불안 증세로 밤잠을 자지 못하고, 대학을 포기한 아들은 유일한 취미인 '그라피티'를 하기 위해 남의 물건에 손을 대고 학교에선 문제아로 낙인찍힌다.

디스토피아의 그늘이 드리운 이 가족에 희망은 있는 걸까.

[영화 속 그곳] 뉴캐슬과 '플랫폼 노동'

◇ '산업혁명의 중심' 뉴캐슬 노동자의 귀환
켄 로치는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이어 이 영화도 영국 북동부의 뉴캐슬에서 찍었다.

뉴캐슬어폰타인(Newcastle upon Tyne)이 원래 이름인 이 도시는 13세기 이후 석탄의 출하항이었다.

17세기부터 런던의 석탄 공급지로 발전했으며, 18세기 중반 맨체스터와 함께 영국 산업혁명의 전초기지가 됐다.

산업혁명의 중심지에서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온 노동자의 고통을 이야기하려는 켄 로치의 로케이션은 절묘하다.

18세기 산업혁명으로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이 시작됐듯이 21세기 4차 산업혁명도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들을 만들어내고, 여지없이 이들을 혁신의 희생물로 삼고 있다는 점이 바로 '뉴캐슬' 배경이 주는 시사점이다.

리키와 같은 택배 기사를 요즘 말로 '플랫폼(platform) 노동자'라고 부른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른 애플리케이션, SNS 등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근로 형태로, 대리운전, 우버 택시, 퀵서비스, 음식배달 등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영화 속 그곳] 뉴캐슬과 '플랫폼 노동'

기업은 정규인력을 고용해 임금을 주고 복지를 책임지는 대신, 개인 자영업자와 계약하는 방식으로 비용을 절감하고 효율성을 높인다.

회사에 소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노조도 없고, 복지 혜택도 없다.

이런 노동 형태는 노동자들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고, 전업주부나 은퇴자들의 노동시장 재진입이 용이하다는 이유로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

그러나 자영업자라는 함정에 빠진 플랫폼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지위를 빼앗긴 채 불완전 고용과 저수입, 과잉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8∼11월 대리운전, 퀵서비스, 음식배달, 가사노동, 프리랜서 등 플랫폼 노동 종사자 82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월평균 소득은 152만7천원이었다.

가사돌봄 분야의 경우 119만6천원에 불과했다.

지난해 최저임금(월 179만5천310원)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같은 해 6월 민주노총 조사에서 플랫폼 노동자들의 월평균 수입은 313만원이었지만, 수수료 등 각종 비용을 제외하면 165만원에 그쳤다.

노동시간은 대기시간을 포함해 하루 13.7시간이고, 주 6일간 근무했다.

[영화 속 그곳] 뉴캐슬과 '플랫폼 노동'

◇ '몸도 마음도 파손주의'
켄 로치는 돈 레인이라는 영국 택배 기사의 실제 사례에서 영화를 착안했다.

당뇨병이 있던 레인은 자신의 배달을 대신해줄 기사를 찾지 못한 채 택배 일을 하루 쉴 경우 발생하는 금전적 손실을 피하기 위해 병원에 가지 않고 일했다.

결국 택배가 피크를 이룬 2018년 크리스마스 때 그는 과로로 사망했다.

지금 전 세계는 4차 산업혁명과 플랫폼 경제가 주는 장밋빛 기대감에 잔뜩 도취된 것 같다.

플랫폼 경제가 곧 '혁신'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고통받는 플랫폼 노동자들의 삶을 외면한다면 '누구를 위한 혁신인가'라는 물음은 불가피하다.

'일한 만큼 벌 수 있다', '당신 하기 나름이야'라는 말 뒤에 은폐된 노예 계약은 명백히 실체를 드러내야 한다.

[영화 속 그곳] 뉴캐슬과 '플랫폼 노동'

택배가 넘쳐나는 시대, '당일 배송', '총알 배송'이 당연해진 지 오래다.

그러나 그렇게 급히 받아야 할 물건이 얼마나 될까.

영화에서 택배 회사 관리자는 리키에게 "네가 갖다주는 물건에만 관심이 있지, 누가 너에게 관심을 두느냐"고 묻는다.

택배의 빠르고 온전한 배송 뒤에는 고된 노동으로 힘겹게 생계를 잇는 사람들이 있다.

'미안해요 리키'의 원제인 "Sorry, We Missed You"는 택배 노동자가 수취인이 부재중일 때 남기는 메모지 문구다.

이를 리키에 대한 미안함으로 표현한 번역을 보고 그 이중적 의미에 무릎을 쳤다.

6년간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인 일명 '까대기'를 했던 만화가 이종철 씨는 자신의 경험을 그린 동명 만화에서 지옥의 알바라는 까대기 종사자들의 고된 노동을 실감 나게 그렸다.

이씨는 책 말미에 택배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두들 몸도 마음도 파손주의입니다.

"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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