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태유나 기자]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포스터.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포스터.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세종 24년, 이천행궁으로 향하던 세종이 탄 가마가 허물어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신하들은 가마 제작을 맡았던 장영실을 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장영실은 곤장 80대를 맞는 벌에 처해진다. 그 후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미스터리로 남은 그의 말년 행적.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이하 ‘천문’)는 그 역사적 기록의 빈틈을 영화적 상상으로 채워 넣었다.

세종과 장영실의 인연은 중세 이슬람 과학자인 알 자자리의 코끼리 시계 그림에서 시작된다. 세종은 관노인 장영실이 실제로 본 적도 없는 물시계를 그려냈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갖는다. 똑같이 만들어볼 수 있겠느냐는 세종의 물음에 코끼리가 없어 불가하다는 장영실. 대신 그는 “코끼리 없이 조선의 것으로 조선에 맞는 것을 만들면 된다”고 말한다. 장영실의 능력을 알아본 세종은 그에게 물시계를 만들라는 명을 내리고,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서운관 국노를 면천시켜 정5품 행사직을 하사한다.

마침내 완성된 물시계 자격루는 일정 시간마다 항아리에서 넘친 물이 구슬을 밀어내 종을 울리는 방식이다. 장영실은 왕과 대신들 앞에서 해시계와 정확히 일치하는 물시계를 선보이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다. 이제 조선은 어두운 밤에도 시간을 알 수 있게 됐다.

세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명나라의 절기가 아니라 조선의 땅에 맞는 절기를 측정해 정확한 달력을 만들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세종은 장영실에게 천문 관측기구를 만들라고 명한다. “천문역법은 명나라 황제만이 다룰 수 있다”는 사대부들의 거센 반대에도 세종은 멈추지 않고, 장영실은 끝내 간의를 발명한다.

그러나 비밀리에 진행한 천문 연구는 결국 명나라에 발각되고, 명나라 사신은 즉시 연구를 중단하고 천문의기를 전부 불태우라 명한다. 장영실은 사대의 예를 어겼다는 죄목 아래 명나라로 압송될 위기에 놓인다.

영화 ‘천문’ 한석규(위부터), 최민식 스틸/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천문’ 한석규(위부터), 최민식 스틸/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천문’은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팩션(Faction) 사극이다. 허진호 감독은 당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발휘해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와 감정을 132분의 영화로 풀어냈다.

영화는 세종과 장영실이 쌓은 업적보다 이들의 감정 선에 집중한다. 세종과 장영실의 첫 만남부터 그들이 같은 꿈을 꾸며 의기투합 하는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세종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장영실을 아끼고, 장영실도 자신의 진가를 알아봐준 세종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두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뇌하기도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장난치고 농담을 하는 등 천진난만한 모습도 보인다. 덕분에 의외의 장면에서 웃음이 터지고, 생각지도 못한 애절한 순간들이 여러 번 등장한다.

다만 그들의 애틋한 감정이 지나치게 강조돼 브로맨스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극적인 사건 없이 감정 표현에만 많은 공을 들여 흐름이 늘어지는 것도 아쉽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등을 연출한 허 감독은 ‘천문’에서도 섬세한 관계 묘사로 몰입도를 높였다. 별이 보고 싶다는 세종을 위해 창호지에 별을 새기는 장영실, 세종과 장영실이 근정전에 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은 애틋하고도 따뜻하다.

영화 ‘쉬리’ 이후 20년 만에 재회한 한석규와 최민식의 연기 조합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한석규는 애민정신 가득한 성군의 모습부터 명나라 간신들을 처단하기 위해 태종의 흑룡포를 입는 모습까지 카리스마 넘치는 세종의 모습을 묵직하게 담아냈다. 이전에 연기한 SBS ‘뿌리깊은 나무’(2011)에서의 세종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최민식은 순수하게 창작에만 몰두하는 아이 같은 성격의 장영실을 설득력 있게 그렸다. 특히 두 배우는 표정과 말투, 몸짓들로 대사 이상의 감정들과 상황들을 표현해내 영화의 깊이를 더했다.

영의정 역할을 맡은 배우 신구의 존재감도 대단하다. 줄곧 나른한 표정과 말투를 유지하다 가끔씩 보여주는 섬뜩한 눈빛 연기가 소름을 유발한다.

26일 개봉. 12세 관람가.

태유나 기자 you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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