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82년생 김지영’ 포스터.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82년생 김지영’ 포스터.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82년생 김지영’ 포스터.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아주 어린 시절엔 내가 온전히 내 시간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넓어질수록 나는 내 시간을 이리저리 나눠 써야 하는 순간들을 맞이한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부모님과 선생님을 기쁘게 해주려고,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연인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나누고 받기 위해, 직장에서 승진하고 인정받기 위해 내 시간을 자꾸 쪼개어 나눠쓰게 된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직장을 가지고, 결혼에 이르면 자꾸 뭔가가 급격하게 달라진다. 상대해야 할 부모의 숫자도 늘고, 겪어야 할 친척의 수도 늘어난다. 개개인에게 요구되는 덕목들이 늘어난다. 그래서 좋은 아빠 혹은 엄마, 좋은 아들 혹은 딸, 좋은 사위 혹은 며느리, 좋은 직장 동료, 좋은 이웃이라는 수많은 갈림길에서 내 시간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을 맞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이의 부모가 되면 이래저래 나눠 쓰다가 내 몫으로 저장해둔 시간까지 탈탈 털어 써야 한다. 그리고 과거, 나와 연결돼 있던 모든 시간들 끝에 묶여 있던 사람들과의 관계, 일, 그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툭 끊어지기도 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여전히 ‘좋은 지영’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던 한 여인이 찢어진 시간을 혼자 오롯이 감당하지 못하는 현재로 쓱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긴 상처, 사람들의 이해와 나의 용기가 만나는 시간을 그린다. 김도영 감독은 과장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시선으로 우울증을 겪고 있는 한 여인과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을 담담하게 관찰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영화적 기교가 없는 덤덤한 화면이 심심하지만, 그래서 이야기는 더 쉽고 정갈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지영(정유미)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광고기획사를 다니던 회사원이었다. 대현(공유 분)과 만나 결혼하고 딸 아영을 낳은 뒤 노을이 질 때면 가슴 한편이 ‘쿵’ 내려앉는 것 같은 산후 우울증을 겪는다. 자꾸 자신의 엄마와 할머니로 ‘빙의’하는 증상을 겪게 된다. 이 때문에 대현은 정신과를 찾게 되고 지영의 가족들도 알게 된다. 김지영이 사회적 차별 속에서 어떤 고통을 받아왔는지 되짚어 가는 르포 형식의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는 산후우울증에 걸린 김지영의 현재를 중심으로 그녀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과정으로 이야기를 정돈했다.

많은 사람들의 입장과 차이를 잔잔하고도 설득력 있게 그려낸 덕에 관객들은 손쉽게 누구 편을 들지도 않고, 또 쉽게 누군가를 힐난하지도 않는 태도로 오롯이 지영이라는 한 여인과 그 주위의 사람들까지 골고루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여성을 피해자로, 남성을 가해자로 나눠버리는 편견이나 또 다른 차별의 문제는 최대한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격앙된 감정이나 공분 없이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다. 어쩌면 사회생활과 육아, 그리고 좋은 아들과 남편이 되려고 서툰 노력을 기울이는 대현의 이야기로 바라봐도 큰 무리가 없을 만큼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우리처럼 부족하지만 애쓰는 인물들이다.

영화에서 우리가 지켜봐야 하는 주요한 지점은 지영의 우울증 증상을 처음 알았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다. 지영의 남편 대현은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건 아닌지’라며 오열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우울증을 마주하면서 사람들은 일종의 죄의식을 느낀다. 그리고 그 죄의식은 자꾸 약해서 비겁해지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상대방을 먼저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에 앞서 우울증이 자신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고 안도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약해지고야 마는 그 순간을 넘어서야 상대방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세상에는 나조차 어쩔 수 없어 아픈 순간이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뭉텅 잘려나간 시간 속에서 아픈 우리의 누이 혹은 친구, 어쩌면 나의 가족이 겪었을지도 모를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원작 소설은 지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한국의 여성들이 겪어 온 차별을 강조했다. 이와 달리 영화는 지영에 대해 여성을 대변하는 상징이나 고유명사가 아니라 이번 생이 처음이라 서툴고 힘들어 어쩔 도리가 없이 제자리를 맴맴 돌고 있는 ‘우리’로 본다. 감독은 지영으로 이야기를 한정 짓지 않고 각자의 입장에 마음을 나눌 다양한 인물들의 목소리와 표정을 고루 나눠 담았다.

영화 속에서 특별히 주요한 장면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박히는 몇 장면들이 있었다. 지영의 전 직장 선배는 가끔 지영을 찾아와 살피고 휴일에도 지영이 부르면 찾아와 만난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은 표정이던 지영은 선배와 함께 있으면 말도 많아지고 밝아진다. 변함없이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선배를 통해 자신의 과거와 만나고 또 미래와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지영을 위해 선배는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나누고 있었다.

‘82년생 김지영’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할 수 있는 시간, 나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나눠줬던 부모님의 시간을 다시 빼앗지 않으려는 배려, 찢어진 시간의 발에 턱 걸려 넘어진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기워보고 묶어주려는 배려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그리고 상대방의 시간을 되돌려주기 위해 나의 시간을 나눠줄 수 있는지 묻는다. 어쩌면 희생과 배려는 아주 얇은 습자지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비추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최재훈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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