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티고' 배우 천우희

계약직 디자이너 서영役
목소리·눈빛·걸음걸이까지
상처 받은 30대 여성 표현
나무엑터스 제공

나무엑터스 제공

스크린과 안방을 넘나들며 존재감을 과시해온 배우 천우희(32·사진)가 짙은 감성 연기로 돌아왔다. 고층빌딩 사무실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던 30대 여성이 창밖의 로프공과 마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버티고’에서다.

천우희가 연기한 서영은 계약직 디자이너다.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짓눌려 있다. 그에게 상사와 회사 동료는 모두 편치 않다. 재혼한 엄마는 새벽까지 전화로 히스테리를 부리고, 이명과 현기증 증세가 갈수록 심해진다. 그나마 자신의 편이라 여겼던 연인과의 관계도 삐거덕거린다.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땐 서영이 답답해 보였습니다. 왜 자꾸 참아야 하나 싶었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더군요. 우리 주변에도 뭐든 수월하게 하는 사람이 있고, 그런 것 자체가 안 되는 사람이 있잖아요.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는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고요. 서영은 그런 사람 중 한 명일 뿐인 거죠.”

천우희는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도 30대 여성 작가 임진주로 분해 공감을 자아내는 연기를 선보였다. 그는 “서영은 ‘멜로가 체질’에서 연기한 진주와는 또 다른 성향”이라며 “둘 다 30대 여성인데 그 모습이 다를 뿐 누가 맞고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2004년 영화 ‘신부수업’으로 데뷔한 천우희는 10년 만인 2014년 ‘한공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써니’ ‘곡성’ ‘우상’ 등의 영화에서 주로 강렬하고 독특한 캐릭터를 맡아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영화 ‘버티고’ 한 장면.                            트리플픽쳐스 제공

영화 ‘버티고’ 한 장면. 트리플픽쳐스 제공

‘버티고’에서는 기존의 강렬한 이미지 대신 연인과 가족, 사회에서 만난 사람 등으로 인해 상처받은 여성의 내면을 섬세하고 깊게 표현했다. 눈빛부터 목소리, 걸음걸이까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서영 그 자체다. 천우희는 “마지막 장면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관우(정재광 분)의 말이 꼭 나한테 해주는 얘기 같았다”고 털어놨다.

“2년 전 가을, 같은 소속사의 김주혁 선배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곧이어 만난 작품 ‘우상’을 찍으면서 연기력의 한계를 절감했고요. 그 어느 때보다 잘하고 싶은 욕구가 컸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죠. 이 때문에 지난해에는 연기에 대한 의욕과 자신감이 바닥까지 떨어졌어요. 연기뿐만 아니라 내가 지닌 능력 등 모든 것이 탐탁지 않았습니다.”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을 때 만난 작품이 ‘버티고’다. 천우희는 “애써 밝은 척하는 연기보다 ‘버티고’ 같은 무거운 작품을 통해 감정을 표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늘 최선의 연기, 가장 완벽한 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괴롭더라도 티 내지 않고 모두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만 여겼죠. 생각해보니 나를 옥죄어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이지 않았나 싶더군요. 이제는 내가 행복하고 나를 먼저 생각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버티고’를 촬영하면서 그는 의욕을 찾고 마음을 추슬렀다. 애니메이션 ‘마왕의 딸 이리샤’에 목소리 연기로 참여하고, 영화 ‘메기’에 출연하면서 다시금 열정에 불을 지폈다. 이어 ‘멜로가 체질’에서 또래 배우들과 소통하며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많은 고민과 잡생각을 한 꺼풀 벗겨냈다.

“‘버티고’를 시작으로 ‘멜로가 체질’까지 열심히 달리면서 삶을 대하는 자세가 조금은 달라졌습니다. 힘든 순간도 지나고 나면 어떻게든 도움이 되더군요. 그런 순간이 있어야 단단해지죠. 단 무조건 참기만 하면 병이 됩니다.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따뜻한 에너지를 받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그들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거든요. 대사 한 줄로 위안받은 저처럼 여러분도 이 영화에서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연기로 인한 고민을 연기로 극복한 천우희의 30대는 그 누구보다 찬란할 것 같다.

“30대는 제일 좋은 나이입니다. 가장 왕성하고 의욕이 넘치는 때잖아요. 30대가 가기 전에 정말 좋은 대본과 연출자를 만나 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싶습니다.”

노규민 한경텐아시아 기자 pressg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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