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지원 기자]
영화 ‘기생충’에서 입주 가사도우미 문광 역으로 열연한 배우 이정은. /사진제공=윌엔터테인먼트

영화 ‘기생충’에서 입주 가사도우미 문광 역으로 열연한 배우 이정은. /사진제공=윌엔터테인먼트

영화 ‘기생충’에서 입주 가사도우미 문광 역으로 열연한 배우 이정은. /사진제공=윌엔터테인먼트

영화 ‘기생충’의 반전은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밤, 박 사장네 집의 초인종이 울리면서 시작된다. 인터폰 화면에 보이는 이는 박 사장네 집에서 잘린 입주 가사도우미 문광이다. 인터폰에 답한 이는 박 사장네 가족이 없는 틈을 타 으리으리한 집을 제 집처럼 만끽하던 기택네 가족. 문광은 빗물 때문에 김이 서리고 자꾸만 내려가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한다. 문광을 연기한 이정은은 ‘기생충’의 숨은 주인공이다. 나오는 작품마다 ‘대박’으로 이끈 이정은이 평범한 가사도우미일 리는 없을 것이라고 관객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지만 ‘띵동’ 소리와 함께 그의 등장은 영화의 장르까지도 스릴러로 바꿀 정도다.

“사실 걱정했어요. 저는 스스로 귀염상이라고 생각해서 누군가에게 공포감을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의심했거든요. 호호. 찍고 나서도 감독님께 좀 무섭냐고 계속 여쭤봤죠. 지문에는 술에 취해서 상처를 입은 얼굴로 찾아온다고 돼 있었어요. 감독님의 주문 사항은 최대한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하라는 거였죠. 그게 묘한 공포를 주는 것 같아요. 해고된 문광이 기택 가족들을 죽이러 오는 건지 아닌지 어떤 이유에 온 건지 모르니까요. 그 애매모호함, 선량함이 더 큰 공포감을 줬던 것 같아요. 폭우에서 계속 대사를 하니까 나중에는 인중도 말아올라가서 감독님이 이젠 하다하다 인중 연기를 하냐고 하셨죠. 하하.”

영화 ‘기생충’ 스틸.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영화 ‘기생충’ 스틸.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영화 ‘기생충’ 스틸.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이정은은 영화 ‘마더’(2009)로 봉준호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옥자’(2017)에서 유전자 조작 슈퍼돼지인 옥자의 목소리 연기를 했다. 이정은은 “‘옥자’를 할 때 (봉준호 감독이) 내년에 스케줄을 비웠으면 좋겠다는 얘길 해서 뭔가 생각하시는 게 있구나 하고는 잊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미국에서 ‘기생충’ 대본을 쓰던 봉 감독은 이정은에게 문광이 나오는 장면의 콘티 몇 장을 보냈다. 그게 바로 문광이 마치 기계체조를 하는 듯한 기괴한 자세로 끙끙대며 지하실 문을 여는 장면이었다. 이정은은 “실제 촬영에서는 와이어를 매달아 찍었는데 영화관에서 보면 방귀 소리도 들린다”며 꺄르르 웃었다.

“‘남아있는 기간 동안 영화를 몇 편이나 찍을 수 있을까요. 정말 앞으로는 재미나고 이상한 영화들을 찍을 겁니다.’ 감독님의 이 말이 인상 깊었어요. 그래서 저는 즐겁고 재밌게 하고 싶다고 했죠. 이번 영화는 부담감보다 어떻게 나올지 흥미로워서 스트레스가 거의 없었어요.”

이정은은 이렇게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세 편에 출연했고, 더불어 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이에 봉준호의 새로운 페르소나라는 평가가 나온다.

“감독님은 예견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마더’를 찍고도 거의 10년 만에 뵌 거죠. 그 동안 사적인 연락을 딱히 한 것도 아니었고요. ‘옥자’ 때는 갑자기 ‘카트’에 나온 제 사진을 보여주면서 옥자와 제 사진을 두고 ‘이제 얘의 소리를 하게 될 겁니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엉뚱하신 분이에요. 호호. 제가 페르소나라는 말을 들으면 그게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작업을 권해준다면 또 하고 싶죠. 하지만 창작자에게 제일 방해되는 건 고정된 멤버라고 생각해요. 자유롭게 생각하고 거기에 맞는 배우를 만나면 되는 것이죠.”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의 포토콜에 선 이정은.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의 포토콜에 선 이정은.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의 포토콜에 선 이정은.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이정은은 서울이 고향인데도 작품마다 다른 사투리를 구사하며 마치 그 지역 사람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경상도 사투리를,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는 전라도 사투리를 능숙하게 보여줬다. 이번 영화에서는 극 중 남편과 장난치면서 북한말을 하는데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웃음이 터진다. 이정은은 “사실 이부자리에서 많이 운다”며 “그 지역에 사는 분들이 보기에 티가 안 날 정도에 도달하고 싶은데 안 되니까 안타까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서울 사람이라 어려움이 있죠. 그래서 귀로 듣고 연습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요. 예를 들어 ‘택시운전사’를 할 땐 광주에 내려가 역사 이야기를 들으면서 양해를 구하고 소리를 녹음했어요. 그렇게 휴대폰에 여러 지방의 사투리들이 녹음돼 있어요. 매번 그렇게는 못해도 여유가 있으면 가서 들으려고 합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미스함무라비’ ‘아는 와이프’ ‘눈이 부시게’, 영화 ‘곡성’ ‘택시운전사’ ‘미쓰백’ ‘미성년’ 등 이정은이 출연한 최근 2~3년간의 작품만 봐도 그가 얼마나 ‘대박’ 작품에서 신스틸러로 활약했는지 알 수 있다. 신스틸러라는 표현도 부족할 만큼 이정은의 존재감은 뚜렷하고 강렬하며 작품을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매번 제 역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주연과 같은 마음으로 연기해요. 조·주연이란 건 사람들이 나눴을 뿐이죠. 제가 맡은 인물의 처음과 끝, 여러 면을 생각하는 편인데 그런 점에서 주연 배우들이 갖고 있는 무거운 짐을 생각하면 대단하죠. 전 제 인생의 나머지 시간을 좀 더 가볍고 즐겁게 하고 싶어서 그런 욕심은 없어요. 호호. 하지만 어떤 역할을 맡아도 이 작품을 더 좋게 만들고 싶어요. 그럴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어요.”

최근 이정은은 일본영화를 하나 찍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바람이 생겼다. 다른 언어로 영화나 드라마를 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넷플릭스 등 플랫폼을 통해 이미 자국 언어로 만들어진 콘텐츠가 해외로도 나가는 상황에서 제 생각이 조금은 사대주의적인가 싶기도 한데, 낯선 언어로 연기하는 건 제겐 도전이잖아요. 낯선 언어를 사용해 연기할 때 묘한 쾌감이 있어요. 기회가 되면 합작 같은 걸 해보고 싶다는 욕심은 있어요. 미국이 아니라 자메이카에서도 찍을 수 있는 거고. 낯선 환경에서 익숙하지 않은 스태프들과 해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 될 것 같아요.”

김지원 기자 bella@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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