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 포스터/사진제공=영화사 빅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 포스터/사진제공=영화사 빅
기다리게 된다. 마음에 드는 영화감독의 다음 영화, 감동을 주었던 작가의 다음 소설. 나를 설레게 했던 그들의 작품이 얼마나 더 숙성돼 내 앞에 나타날지, 그들에게는 또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지, 팬들은 기다린다. 그렇게 몇 년을 기다려도 쉽게 작품을 만들지 않는 예술가들도 있다. 그럼에도 팬들은 기다린다. 기다림은 감질나지만, 또 다른 설렘이기도 하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부지런한 예술가들도 있다. 팬들의 입장에서는 꽤 고마운 일이다. 한 권을 채 읽기도 전에 다음 작품이 출간되는 것 같은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거의 매년 한 편의 작품을 뚝딱 만들어내는 영화감독 미이케 다카시는 참 부지런한 예술가들이다. 여러 편의 작품들로 명성도 얻었고 인지도도 높은 예술가들이다. 하지만 띄엄띄엄 그들의 명성만을 믿고 징검다리처럼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작품은 때론 완성도의 편차가 커 보인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공교롭게도 다작 예술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이케 다카시가 만난 작품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데뷔 30주년 기념 작품으로 유명세를 얻은 동명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와 감독의 유명세에 크게 힘입어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들과 제작진이 한자리에 모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히가시노 작가의 ‘용의자 엑스의 헌신’과, ‘오디션’ ‘악의 교전’ 등 잔혹한 고어 작품으로 유명한 다카시 감독의 작품을 기대하는 관객들에게 ‘라플라스의 마녀’는 다소 심심하다. 작가의 이전 소설과 다른 방식으로 파편화된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여 독특한 결말에 이르는 원작소설을 축약하면서도 등장인물들을 간소화하지 않은 각색이 아쉽다.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 스틸/사진제공=영화사 빅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 스틸/사진제공=영화사 빅
과학으로 살인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히가시노 작품의 특성은 이 영화에도 드러난다. 영화 제작자의 시신이 발견된 온천 휴양지가 시작이다. 사인은 황화수소 중독이다. 사망 사건이 발생한 지형적 특성상 단순 사고라고 확신하는 과학자 아오에와 살인 사건임을 의심하는 나카오카 형사가 만난다. 여기에 연쇄 살인을 의심하는 미스터리한 소녀 우하라 마도카가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뒤섞인다. 과학으로만 증명 가능한 미스터리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복선으로 얽혀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아쉽게도 촘촘하지 않고 평이한 편이다. 다카시 감독 특유의 악취미도, 논란이 될 만한 정서도 히가시노 작가 특유의 세밀한 과학적 묘사와 설득도 부족한 편이다.

2010년 영국 영화잡지 토탈필름에서 역대 가장 불편한(Disturbing) 영화 25선을 선정한 적이 있는데, 기라성 같은 작품들을 사이에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함께 미이케 다카시는 ‘오디션’과 ‘비지터 Q’로 10위권 안에 2개의 작품을 올렸다. 시간이 나면, 의뢰가 들어오면, 고민 없이 영화를 찍는다는 그의 말처럼 비디오 성인 영화, 어린이 영화, SF, 호러, 코미디, 멜로, 판타지 등이 마구 뒤섞여 있다. 그 가운데 잔혹한 악취미를 가진 작품들은 꽤 흥미로운 결과를 낳았다. 사실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작품은 그의 명성 때문이 아니라 독특하고 날선 정서에 대한 호기심으로 보게 된다. 우리가 기대하는 다카시의 작품은 오픈 되자마자 매진되는 영화제의 미드나잇 세션 참가작인데, ‘라플라스의 마녀’는 거부감 없이 평이한 편이라 아쉬움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완성도가 겅중거리는 다카시 감독의 다음 작품은 숙성되어 돌아오기를 바라는 팬들에게 기다림의 시간을 지금보다 좀 더 길게 줘도 좋을 것 같다.

최재훈(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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