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유청희 기자]
권소현은 어떤 역할을 해도 여운을 남기는 배우다. 뮤지컬,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한 그의 영화 데뷔작이자 첫 주연작인 ‘마돈나’에서 성매매의 늪으로 흘러가는 사회 최약자 장미나가 그랬다. 반려견은 끔찍이 아끼지만 남자친구의 딸에게는 폭력을 일삼던 ‘미쓰백’의 악역 주미경도 마찬가지였다. ‘암수살인’에서는 할머니에게 옷가게에서 일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단란주점에서 일하는 피해자 오지희를 연기했다. 그런 그가 최근 종영한 MBC 주말드라마 ‘내사랑 치유기’에서는 소유진의 철부지 막냇동생이 돼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의 첫드라마 데뷔작이기도 했다. 지금껏 보아왔지만 앞으로 더 오래 보고 싶은, 다양한 얼굴을 가진 권소현을 만나 연기에 대한 애정과 더 많은 역할에 대한 갈증을 들었다.

배우 권소현. /이승현 기자 lsh87@
배우 권소현. /이승현 기자 lsh87@
10. ‘내사랑 치유기’에서 철부지 막냇동생 임주아를 연기했습니다. 영화를 통해 보여준 역할과는 많이 달라보였어요.

권소현: 영화에서는 사연이 많고 인생이 힘든 연기를 많이 해왔죠. 주아는 극 중 중심 사건을 만들기 보단 활력을 주는 기능을 했잖아요? 처음 캐스팅 단계부터 엄마 역이길 바랐던 황영희 선배님을 비롯해 쇼리 오빠와 함께하면서 행복했습니다. 애드리브는 배우들과 사이가 좋아야 불편하지않게 잘 나오는데, 우리는 정말 재미있게 했어요. 극 중 이리저리 치이는 소유진 언니를 보면서는 안쓰럽기도 했고요. 사실 영화에서 보여준 것 말고 연극에서는 주아와 비슷한 캐릭터를 더 많이 해왔어요.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본능적인 역할’을 맡아서 제목처럼 ‘치유’를 얻었습니다.

10. 영화에서 보여주던 모습과 달리 유쾌한 성격 같아요.

권소현: 맞아요. 역할, 분장, 옷. 이런 것에 따라 분위기가 많이 달라 보인다고들 해요. 오디션을 볼 때 “‘마돈나’에서 뭐하셨어요?”라고 물어서 “어, 저 장미나요…”라고 하면 “네?” 하고 되물으세요. 하하하. 그런데 ‘치유기’ 오디션 때는 감독님 앞에서 대사를 읽는데 ‘이렇게 읽는 건 또 처음 보네요’ 하면서 웃으시더라고요. 전작의 이미지를 드리우지 않고 저를 보신 것 같았어요. 미나는 살도 쪄있고, 자존감이 낮고 여린 캐릭터여서 ‘마돈나’를 보신 분들은 미나가 엄청 인상적이었다고 하시고, ‘미쓰백’을 보신 분들은 저를 세상 나쁜 놈으로 보십니다. 평소 성격도 그러냐고 제 생활을 궁금해하시곤 해요. (웃음)

MBC ‘내 사랑 치유기’에서 철 없는 임주아 역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 권소현./사진=방송 캡처
MBC ‘내 사랑 치유기’에서 철 없는 임주아 역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 권소현./사진=방송 캡처
10. 영화나 연극이 아니라, 장편 주말드라마에 출연했어요. 주위 반응에는 변화가 있었나요?

권소현: 앞서 말한 것처럼 ‘권소현’일 때와 캐릭터로서의 저는 많이 달라요. 저를 잘 못 알아보시는데, 동네 편의점 아주머니가 알아보셔서 신기하고 감사했죠. 그런데 그게 거의 다예요. (웃음) 그래도 편한 드라마여서 가족들과 고향 친구들이 좋아했어요. 이제껏 곡절 많은 캐릭터를 보여주다 가벼운 연기를 하니 그나마 저와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본 게 아닐까 해요. 제가 연극과를 나왔으니 20대 때 만난 연기하는 친구들은 어떤 역할도 이해하는 편인데, 고향친구들은 영화에서 사연 많은 역할을 보고 ‘괜찮겠냐’고 걱정하기도 했죠. 전 충분히 괜찮은데 말이에요. 하하하. 특히 할머니는 심장이 안 좋으셔서 영화 데뷔작인 ‘마돈나’를 못 보여드려서 아쉬웠거든요.

10. 악역을 연기했던 ‘미쓰백’으로 영평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셨어요. 스스로를 “자세히 봐야 조금 예쁜 배우같다”면서 “오래봐서 사랑스러운 배우가 되겠다”던 수상 소감이 화제를 모았습니다. 스스로 예쁘지 않다고 생각한 건가요?

권소현: 제가 화제를 모았는지 지금 처음 알았어요. (웃음) 수상 소감은….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여배우’라고 하면 날씬하거나, 아름답거나, 키가 크거나 등 외적인 부분이 연기보다 부각되고 평가될 때가 많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그런데 그 기준대로라면, 저는 특출나게 화려하거나 우리나라의 미의 기준 안에서 독특하게 아름답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하게 된 말이에요. 어쩌면 그래서 제가 미나나 주미경 등 일반적이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할 땐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전 여자배우로서 항상 ‘도장 깨기’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요. 역할 하나하나를 하면서 편견을 깨는 느낌이기도 하고요. (웃음)

10. 수상 후 변화가 있었나요?

권소현: 수상 소감 후 주변에서 ‘너 예뻐!’ ‘너 왜 그래, 너 예쁘단 말이야’라고 말씀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저는 꾸준히 연기를 보여줘서 연기로 배우를 알게 하고, 신뢰감을 줄 수 있길 바라서 한 말이었는데…(웃음) 연기를 잘해서 제가 더 예뻐보였으면 한단 뜻이에요. 참, 남자배우들을 두고 ‘연기 성형’이라는 말을 하잖아요? 그냥 보기에는 평범하게 생긴 배우인데, 연기를 너무 잘해서 ‘영화가 끝나면 이 배우가 이제 신처럼 보인다. 섹시해보인다. 잘생겨 보인다’라고 하는 반응들요. 저도 딱 그런 ‘연기 성형’ 받고 싶은 마음이에요. ‘연기 성형’이라는 말이 여자 배우에게 적용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자주 자주 좋은 배역의 기회가 와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10. ‘‘마돈나’ 후 약 3년간 이런 자리에 설 수 있을지 몰랐다’는 수상 소감도 먹먹했습니다.

권소현: ‘마돈나’ 후 ‘미쓰백’을 만나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있었어요. 솔직히 힘들었어요. 연기자가 연기를 못하게 된다는 건 당연히 힘든 일이니까요. 상을 받는 것도 특별하지만 그냥 그런 자리에서 다시 작품으로 인사를 드릴 수 있을까 했습니다. 그만큼 ‘마돈나’ 후 ‘미쓰백’은 오랜 기다림 끝에 온 고마운 작품이었어요.

10. 데뷔작 ‘마돈나’로는 칸에도 초청됐죠. 들뜰 법도 했을 텐데요.

권소현: 영화 데뷔 전, 공연을 하면서부터 적립된 생각이 있어요. 20대 때 무대에서 한번 큰 작품을 했는데, 그때 ‘아, 이제 나랑 같이 하자는 사람들이 좀 생기겠지?’ 했죠.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되지가 않더라고요. ‘이런 생각이 참 독이 되는 구나’라는 걸 느낀 후로는 그렇게 들뜨지는 않아요. 주연을 맡았던 ‘마돈나’로 칭찬해주셔도 그냥 ‘아니야’라고 말하게 되더라고요. 잘 되면 좋은 거지만 안 돼도 그냥 담담한 편이에요. 그렇다고 힘 빠지면서 힘들어하진 않아요. 어떻게 되든 그냥 내가 살아오던 대로 친구들이랑 잘 놀고 그런 편입니다.

영화 ‘미쓰백'(위쪽), ‘마돈나’ 의 권소현./사진=스틸컷
영화 ‘미쓰백'(위쪽), ‘마돈나’ 의 권소현./사진=스틸컷
10. ‘마돈나’의 미나, ‘암수살인’의 피해자, ‘미쓰백’의 악역 주미경까지.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바뀔 때가 있었지만, 방법의 옳고 그름을 떠나 처절할 만큼 인생에 최선을 다하는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캐릭터들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권소현: ‘마돈나’는 그냥 왔어요. ‘미쓰백’은 열심히 오디션을 봤고요. 배우로서 저는 ‘어떡하지? 못할 것 같아’라고 생각되는 역할을 하나하나 깨부숴나가면서 해나가는 데 쾌감을 느끼는 타입이에요. 연기를 훌륭히 했든 못했듯 그렇게 해야 뭐가 남더라고요. 대학로에서도 밝은 역할을 주로 하면서 가끔 어두운 캐릭터를 만났지만, ‘마돈나’의 미나는 완전히 다른 타입이었어요. ‘미쓰백’ 대본을 읽었을 땐…. 아이를 가해하는 역이었고, 있어서는 안 되는 범죄자지만 ‘인생 참 힘들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마저도 참 구질구질하고… 그래서 오디션을 볼 때 울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진짜 열심히 오디션을 봤죠.

10. 연기는 언제부터 하고 싶었나요?

권소현: 제 얘기 되게 재미없는데…(웃음) 지금은 사람들이 절 볼 때 조금 부끄러워하는 편이에요. 셀카도 잘 안 찍고요. 그런데 어렸을 때는 앞에 나가 뭘 보여주는 걸 좋아했어요. 무용도 했고요. 안동에서 자랐는데, 대구에서 어린이 뮤지컬단을 모집한다고 하면 엄마한테 떼를 썼죠. 죽어도 안 보내주시긴 했지만요. 그냥 또래처럼 평범하게 살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아, 나 안 되겠다. 연극영화과 가야겠다’고 해서 가게 됐다는 아주 재미없는 스토리입니다. (웃음)

10. 안동여고를 나오셨죠? 교훈이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한국 여성이 되자’더군요. 학교와 안동 지역의 분위기가 유년과 연기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까요?

권소현: 교훈은 당연히 기억하지 못했어요. 하하하. 저는 좀 진취적인 여성이었죠. (웃음) 엄마가 그렇게 키운 것 같아요. 집에서 할아버지가 족보 앞에 앉혀놓고 우리 대손을 설명을 해주신 것도 기억나고요. 좋은 배움이었죠. 그것 빼고는 다 비슷비슷하게 자란 것 같아요. 그래도 확실하진 않지만, 안동여고에서 연극과를 간 게 제가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어요. 공부 열심히 하는 학교였거든요. 그렇게 보니 저도 별종이었네요.

10. 영화에서 보여준 역할이 모두 유흥업소 여성을 거치더군요. 이런 조건이 역할을 고를 때 부담이 되진 않았나요?

권소현: 소모적으로 표현됐다면 고민이 됐을 거에요. 그런데 ‘미쓰백’의 아동학대자 주미경은 여성성을 소모하는 역할은 아니었죠. ‘암수살인’에서 맡은 역할은 단란주점에서 노래방 도우미를 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여성이었어요. 일이 힘들고 돈이 없어서 할머니한테는 옷가게에서 일한다고 거짓말하는 사연있는 인물이요. 남자들이 성적으로 착취하는 캐릭터였지만, 그만의 사정이 있었어요. 자극적으로 보이는 표면을 떠나서 캐릭터의 이야기가 있는지가 중요했어요.

권소현은 “못할 것 같은 것을 하나하나 깨부숴나가면서 연기하는 데 쾌감을 느낀다”고 말했다./이승현 기자 lsh87@
권소현은 “못할 것 같은 것을 하나하나 깨부숴나가면서 연기하는 데 쾌감을 느낀다”고 말했다./이승현 기자 lsh87@
10.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역할도 많을 것 같아요.

권소현: 안 해본 역할이 많아서 모든 걸 다 해보고 싶죠. 영화 ‘스타 이즈 본’의 남자 가수 역할을 여자로 바꿔서 해보고 싶어요. 한국에서는 아직 못 본 것 같은데, 여자 깡패 역할도 정말 하고 싶고요. 깡패라고 멋 부리고 화려한 거 말고, 현실에 딱 붙어있는 깡패요. 흉기 하나를 써도 (칼로 찌르는 흉내를 내며) 이렇게 좀 더 치졸하게 쓰는 양아치 느낌의…? (폭소) ‘스윙키즈’에서 도경수 씨가 한 로기수 역할도 해보고 싶어요. 춤도 추면서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도 갈등하는 그런 역할이요. 온 세상에 해보고 싶은 게 많아요. 그런 시나리오가 이 세상에 많으면 저도 해볼 수 있겠지만, 여자 캐릭터가 그런 역으로 나오기는 힘드니까요. 한복 입는 연기도 해보고 싶어요.

10. 어릴 적 롤모델을 비롯해 지금은 어떤 배우를 좋아하는지 궁금해요.

권소현: 사실 롤모델에 대한 개념이 없었는데요, 이제는 롤모델이 계속 바뀌고 너무 많아져요. 제가 꾸준히 연기를 할 수만 있는 운이 된다면 ‘여자 최민식’이라는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어요. 하하하. 그렇게 자유로운 모습을 말이에요. 또 영화 ‘스파이’의 배우 멜리사 맥카시가 떠오르네요. 어렸을 때 서울이 아닌, 연예인과 방송가와 접촉하기 힘든 안동이라는 도시에서 자라면서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면 ‘안 돼’ ‘너는 키가 작아서 안 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때마다 내가 배우가 돼 ‘장르’를 넓히고 싶다고 늘 말해왔어요. 이제 그렇게 말하기엔 나이가 들어 좀 부끄럽지만, 그래서 더 멜리사 맥카시가 대단해 보여요. 이 ‘여배우’가 전형적인 늘씬한 몸매가 아닌데 연기로서 자신의 장르를 구축하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모습을 닮고 싶어요.

10. 연기자로서 지금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게 있다면요.

권소현: ‘꾸준히 작품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거요. 그거 하나입니다. 꾸준히 보여줄 수 있어야지 제가 말해왔던 꿈도 지킬 수 있는 거니까요.

10. 다음 작품도 궁금합니다.

권소현: 얘기하고 있는 건 있는데, 뭘 선택해야할지…. 아주 여러 개 중에 고른다는 게 아니라 뭘 선택해야 지금 내 나이, 권소현에게 좋은 선택일까 고민하고 있어요. 드라마든 영화든 따지지도 않고, 역할이 내게 좋거나 사람들이 좋으면 항상 가요. 사람을 좋아해서 중간 중간에 이전에 함께한 분들의 작품에 특별출연할 지도 모르겠네요. 저예산 영화 특별출연도 하나 할 것 같고요. 가리지 않습니다.

10. 지난해 많은 활동을 보여주셨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권소현: 이런 질문 너무 어려워요. (웃음) 화려한 배우는 아니어도, 역할을 하면 항상 그 역에 맞게 연기하는 배우요. 앞으로 한 1, 2년 사이에는 소처럼 일하는 배우가 되고 싶고요.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기보다는 계속 열심히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유청희 기자 chungvsky@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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