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사진=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포스터
사진=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포스터
‘라이프 오브 파이’가 5년 만에 재개봉했다. 세상 속 나와 이방인 혹은 세상 속 이방인으로서의 나와 타인 사이의 갈등과 화해, 공존의 법칙에 대한 진지한 질문은 ‘라이프 오브 파이’의 거대한 화두 중 하나이며 여전히 낡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질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아름답고 심오하다.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사슬 앞에서 결코 양립되어 보일 수 없었던 인간과 호랑이의 공존은 아름답다. 당장 생존에 지장을 줄 법한 호랑이를 적으로 간주하기보다, 함께 위기를 해쳐갈 동반자로 보았던 영화 속 파이의 지혜는 이안 감독의 전작들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질문과 맞닿아 있다. 결과적으로 파이의 생존은 이방인이 나의 적이 아닌, 공생의 동반자라는 깨달음과 함께 한다.

3D로 펼쳐지는 태평양의 풍광은 격정적이고 역동적이지만, 이안 감독 특유의 섬세한 연출력을 살린 감성적인 사색이 영화의 전체를 감싼다. 폭풍우라는 거센 절망과 생존의 위기 속에 표류하면서도 인간이 지녀야 할 것은 희망이며, 그것이 인생의 본질이라는 이안 감독의 메시지는 자연스럽게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아우른다. 최첨단의 기술력으로 한계를 뛰어 넘은 피터 잭슨의 ‘호빗’부터 3D 영화를 통해 감동까지 맛볼 수 있었던 ‘아바타’, 디즈니와 픽사의 애니메이션 등 앞선 작품들은 기술력과 이야기의 훌륭한 조합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작품들이었지만 3D 안경을 끼고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영화를 통한 ‘공감’이 아니라 테크놀로지를 통한 감탄을 원하고 있다고 앞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안 감독은 ‘라이프 오브 파이’를 통해 경이로움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실감나는 표현을 위한 기술을 통해 영화가 추구해야 하는 ‘공감’이라는 근원적 감동에 다가간다. 이를 위해 놀이동산에 온 것 같은 영화적 체험을 위한 3D가 아니라, 이야기를 보조해주는 수단으로서 3D 기술력의 완급과 강약을 이야기의 층위에 맞게 조절해낸다. 그렇게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영화의 감동과 드라마의 효과적인 표현을 위한 테크놀로지의 활용이라는 공생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되었고, 5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진심은 유효하게 느껴진다.

이안 감독은 미국 속 동양인, 전통적 가치에 맞선 젊은이, 보수적 세상 속 동성애자, 스파이 등 주로 경계에 선 이방인의 이야기를 그렸으며, 퀴어, 멜로, 여성, 가족, 무협, 블록버스터, 음악, 전쟁, 시대, 3D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선보여 왔다. 하지만 그 이방인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고 오히려 객관적 진실함으로 다가온다. 이안 감독에게 성별, 국적, 장르의 경계란 이미 무의미한 분류에 불과하다. 그는 경계가 나눠지는 부분이 어디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이제는 이안 감독이 난도질 슬래셔 영화를 찍는다고 해도 놀라움 보다는 기대가 앞설 것이다. 이안이라면 칼을 휘두르는 자와 찔리는 자 사이의 유대와 생존, 그리고 그 사이에 오가는 삶의 의미를 또 그 장르 속에 녹여낼 것이기 때문이다.

최재훈(영화평론가)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