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수경 기자]
일본 작가 하루의 감성을 지닌 싱어송라이터 은호 / 사진제공=에비드 엔터테인먼트
일본 작가 하루의 감성을 지닌 싱어송라이터 은호 / 사진제공=에비드 엔터테인먼트
“무라카미 하루키는 제 감성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 제가 가사를 쓸 때면 마치 하루키라는 친구가 옆에서 도와주고 있는 것 같아요. 하루키는 멀리 있지만 가까이 있는 친구와도 같죠.”

최근 싱글 ‘상자’를 발매한 싱어송라이터 은호는 ‘상자’의 가사를 쓰고 멜로디를 입힐 때를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하루키 작품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외톨이다. 은호는 “하루키의 외톨이를 볼 때면 거울 속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하루키의 소설 ‘양을 쫓는 모험’ 속 ‘나’처럼 전 처절하게 외로웠어요. 태어날 때부터 외톨이였던 것 같아요. 하루키의 글들이 이런 제 마음을 대신 정리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닫아두고만 싶었던 마음을 꺼내보려는 용기가 생겼던 것 같아요. ‘너로 가득한 그 상자 열어줘요 꺼내줘요’라는 ‘상자’의 가사처럼요.”

은호의 ‘상자’ 커버 / 사진제공=에비드 엔터테인먼트
은호의 ‘상자’ 커버 / 사진제공=에비드 엔터테인먼트
‘상자’는 은호의 두 번째 싱글이다. 첫 번째 싱글 앨범은 지난해 9월 1일 ‘Open Button’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됐다. 앨범에는 타이틀곡 ‘무궁화 꽃이’와 ‘우유 한모금’ ‘무궁화 꽃이’의 인스트루멘털(반주) 버전이 수록됐다. 어엿한 싱어송라이터로 걸음을 내디딜 때까지 은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외톨이였다.

“중학교 3학년 때 무작정 연기나 춤을 하고 싶어서 예술고등학교 오디션을 준비해 무용과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답답했어요. 발레는 손가락의 각도까지 정해져 있거든요. 수학 공식처럼요. 그래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감명 받아 다시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는데, 연기도 결국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표현해내는 것이더라고요. 하지만 음악은 달랐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제 마음을 나열할 수 있고, 부를 수 있었어요. 드디어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랄까요. 이제야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난 것 같았죠.”

은호는 ‘상자’ 재킷 이미지의 색감과 뮤직비디오의 구성에 대한 아이디어까지 내며 아티스트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 한겨울 강원도의 인제의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촬영한 뮤직비디오는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처럼 고요하고 아름답다. 은호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연출한 감독 웨스 앤더슨의 전작 ‘문라이즈 킹덤’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콘티를 짰다”고 밝혔다.

은호 ‘상자’ 뮤직비디오 속 장면 / 사진제공=에비드 엔터테인먼트
은호 ‘상자’ 뮤직비디오 속 장면 / 사진제공=에비드 엔터테인먼트
“판타지 요소가 섞인 로드 무비의 한 장면처럼 ‘상자’의 뮤직비디오가 연출되기를 바랐어요. ‘상자’를 어디에 둘지 고민하는 제 마음 속의 공간을 판타지처럼 그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한파가 올 줄은 몰랐습니다.(웃음)”

은호는 전문적으로 음악을 배운 적이 없다. 음악도 믹싱이나 녹음 등 엔지니어가 필요한 작업을 제외하면 혼자 만든다. 그러나 상자, 무궁화 꽃, 우유 한 모금 등 일상에 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공기처럼 잊어버리는 소재를 찾아내 그만의 감성으로 재해석하는 탁월한 재능이 있다. 작사의 비결에 대해 은호는 “어렸을 때부터 시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때 윤동주 시인을 좋아했어요. 그의 연약함이 시에 솔직하게 반영된 점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서울 청운동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가서 ‘나도 내 모습대로, 포장하지 말고 살자’고 생각했어요. 나를 숨기고 싶은 마음과 솔직해지고 싶은 마음이 언제나 싸우는데, 이런 고민을 거쳐서 음악이 하나 둘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은호만의 매력은 서서히 입소문을 타고 있다. ‘상자’는 멜론 장르별 차트 79위까지 올랐고, 멜론 인디 차트 순위권(100위)에도 진입했다. 페이스북 페이지 ‘인디학 개론’에 올린 은호의 연주 영상은 조회수 13만을 돌파했다. 그 어떤 방송 출연이나 공연 없이 이뤄낸 성과다.

“앞으로 더 보여주고 싶은 음악이 많아요. 올봄 즈음에 대여섯 곡이 수록된 미니 앨범을 발매할 예정인데, 지금까지의 곡보다 더 밝은 곡도 있어요. 저한테도 엄청 신나고 밝은 감성이 있거든요.(웃음) ‘은호가 밝으면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기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은호는 하루키 같은 뮤지션으로 성장하고 싶다고 밝혔다.

“완벽하게 예쁘고 환상적인 뮤지션보다는 ‘나 같은 사람이 여기 또 있네’라고 느껴지는 뮤지션이 되고 싶어요. 저한테는 하루키가 그렇게 느껴지거든요. 알 수 없는 길을 같이 걸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때로는 전우애도 느껴요. 제 음악을 듣고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어서 다행이다’라고 느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김수경 기자 ksk@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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