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유진 기자]
김기리가 서울 중구 청파로 한경텐아시아 루이비스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사진=이승현 기자 lsh87@
김기리가 서울 중구 청파로 한경텐아시아 루이비스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사진=이승현 기자 lsh87@


“‘개그맨’이라는 말이 어딨어요? 코미디언도 아니고.”

개그맨 말고 희극배우. 김기리는 이 짧은 문장으로 최근 다양해진 활동 이유를 설명했다. 존경받는 희극인이 되기 위한 먼 발걸음은 지난 7년간 몸담았던 ‘개그콘서트’ 품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일주일에 하루, 10분가량 방송되는 코너 몇 개를 위해 일주일을 쏟아야 했던 공개코미디 방식으로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없었다. 자유로운 스케줄을 확보한 뒤에야 예능·드라마·다큐멘터리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이 가능했다. 여전히 ‘개그맨’이라 불리며 ‘웃음을 주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 그는 “어느 순간에도 개그를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확고한 신념을 드러냈다.

김기리의 말대로 그는 항상 웃겼다. 나름 진지하게 도전했던 JTBC ‘힙합의 민족2’에서는 물론 SBS 교양 프로그램 ‘수저와 사다리’에서 조차 그는 등장만으로 유쾌한 공기를 만들어냈다. 그는 실제로도 장난기가 가득 밴 말투로 인터뷰 내내 웃음을 줬지만, 자신의 꿈을 논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할 줄 알았다. 그가 확실히 진중하고 묵묵하게 ‘개그맨’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와 닿았다.

“제가 여기저기 나오는 모습을 대중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모르지만, 저는 학교 다닐 때부터 항상 ‘나는 무엇을 잘할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공부도 잘 못하는 편이었거든요. 학창시절에 찾았던 적성 중 하나는 오락부장 역할이었어요. 자연스럽게 ‘개그맨’이 됐죠. 개그하는 사람들도 참 끼가 많은 편이라, 최근에 같은 고민을 다시 하던 중에 찾은 게 바로 랩이었어요.”

‘힙합의 민족2’를 통해 남다른 랩 실력을 자랑한 그는 ‘재발견’이라는 호평과 함께 주목 받았다. 쟁쟁한 랩 실력을 지닌 스타들 사이에서 (심지어 딘딘과 파이널 무대에 올랐다) 최종 4위라는 쾌거를 이뤄낸 그는 “예상했던 결과”라고 너스레를 떨며 “가수도 아닌 제가 만약 우승을 했다면 엄청 민망했을 거다. 처음부터 5등 안에 드는 걸 목표로 했다”라고 진심으로 만족해했다. 그는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는 질문에 ‘기리와 디니’라는 곡을 선보인 파이널 무대를 꼽았다.

개그맨 김기리 / 사진=이승현 기자 lsh87@
개그맨 김기리 / 사진=이승현 기자 lsh87@
마지막 무대에서 그는 ‘사실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래퍼들이 아니에요/진짜 김기리 respect’라는 가사와 함께 여러 ‘개그맨’들의 이름을 나열한 속사포 랩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딘딘과 코믹하게 꾸민 디스코풍 무대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는 알면서도 이 부분을 꼭 넣기 위해 딘딘과 다툼까지 불사했다고 말했다.

“저는 래퍼들이 가장 부럽고 멋있다고 생각했던 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랩을 통해 얘기하는 거였어요. 방송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신경 쓸 부분이 많아서 그런 식으로 자기 목소리를 못 내잖아요. 전 이번 기회에 제가 평소 존경하던 선배님들을 꼭 언급하고 싶었어요. 그 분들을 닮고 싶어 하는 제 진심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그런데 딘딘은 코믹하고 밝은 분위기를 원했고, 제가 마지막에 넣자고 한 부분이 흐름상 안 어울린다는 이유로 끝까지 반대하더라고요. 평소에 친한 사이인데도 서로 마음 상할 정도로 부딪혔어요.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에 계속 설득했죠. 솔직히 때릴 뻔했어요.(웃음)”

당시 그는 신동엽·박수홍·유재석 등 최근 핫한 개그맨 출신 MC들과 더불어 임하룡·장용·故남철·故남성남 등 원로 ‘개그맨’들까지 언급했다. 딘딘은 “몇몇 분들은 라임을 맞추기 위해 넣은 것”이라고 농담했지만 김기리는 진심 가득한 존경심이었다고 밝혔다.

“임하룡 선배님을 비롯해서 과거 활동하셨던 선배님들은 코미디부터 MC, 연기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감독까지 다양한 분야를 소화하신 진짜 희극배우들이세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좋은 길을 닦아놓으셨다고 생각해요. 제가 희극배우를 꿈꾸게 된 것 처럼요. 요즘 많은 후배들이 무조건 공개코미디 다음은 MC라고 생각하는데 이 직업을 더 넓고 다양하게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개그맨’이라는 단어는 그런 의미에서 한정적이에요. ‘희극배우’라고 하면 원래 우리의 영역 안에서 할 수 있는 더 많은 게 떠오르잖아요.”

힙합 무대를 통해 멋지게 소신을 전한 김기리의 다음 행보는 연기다. 그는 오는 2월 6일 첫 방송되는 SBS 미니드라마 ‘초인가족 2017’에서 처음 연기에 도전한다. 초반 부담감이 컸던 그는 “‘개그콘서트’에서 보여준 대로만 해달라”는 최문석 PD의 말에 걱정을 덜었다. 김기리는 극중 능글맞은 성격으로 사회생활에 능한 직장인 역할로 등장한다. 평소 그의 유쾌한 이미지에 딱 맞는 캐릭터다.

김기리 / 사진=이승현 기자 lsh87@
김기리 / 사진=이승현 기자 lsh87@
“기획 단계부터 제 이미지를 염두에 두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준비를 할지 여러 번 여쭤봤는데도 뭘 따라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모습을 원하셔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여드릴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을 잘 해내서 개그도 하고 연기도 가능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김기리가 이번 연기 행보에 특히 더 욕심을 내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여러 방면에서 잘 돼서 자연스럽게 후배들을 이끌어줄 수 있는 멋진 선배가 되고 싶다”고 큰 포부를 드러냈다.

“이미 여러 분야에서 활동 중인 많은 선배님들이 계시긴 하지만, 저도 개그하는 사람들의 활동 영역을 넓힌 여러 선배들 중 한 명이 되고 싶은 마음이에요. 사실 여건만 되면 코미디 무대와 다른 활동을 병행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커요. 저 같은 경우 7년간 한 주도 안 쉬고 ‘개그콘서트’에 출근했는데 갑자기 안하려니 얼마나 허전하겠어요. ‘힙합의 민족2’에서 개그를 짜면서 아쉬움을 달랬죠.(웃음)”

지난해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유민상의 ‘주차비 소신 발언’으로 재차 화두에 오르기도 했던 공개코미디 프로그램 출연자들의 열악한 환경은 익히 알려진 현실이다. 김기리는 “점점 나아지고 있어 다행이다”라면서도 다른 활동과 공개코미디를 병행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일주일 내내 아이디어를 짜고 연습하고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낸 대가로 받는 값진 출연료는 그 액수가 너무 적어, 조건 없이 대학로 공연 무대에 오르던 시절의 열정까지 사라지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그는 “예능 패널로 출연해서 하루 만에 버는 돈과 비교되다보니 자연스레 공개코미디에 대한 출연자들의 애정도 사라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사실 개그는 행복하려고 택하는 직업이잖아요. 래퍼들이 하고 싶은 랩을 하면서 돈을 벌 듯이요. 저 개그 지망생 때 월급이 20만 원이었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심지어 못 받을 때도 있었지만 분명히 행복이란 걸 느꼈거든요. 개그하는 사람들 전부 유쾌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대부분 ‘개그맨’이라는 꿈을 이루고 나서도 현실에 부딪히는 순간이 오니까 좋아했던 일을 싫어하게 되더라고요. ‘이거 하려고 그렇게 힘들게 버텼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정말 힘들어지거든요. 언젠가 개그를 직업으로 삼은 것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개그맨이 짱이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순간이요. 그래서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누군가 저를 보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게요.”

김유진 기자 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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