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물은 몇 년 전만 해도 방송국의 기피 대상이었다. 오로지 마니아 층을 위한 이야기로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중반부에 시청자 유입이 어렵다는 단점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큰 변화가 생겼다. 모두가 조심스러워하던 장르물이 다양한 소재와 형태로 지상파, 케이블 등을 장악하며 방송가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싸인'부터 '시그널'까지…김은희표 장르물, 이렇게 탄생했다
장항준 감독, 김은희 작가 부부가 바로 이 트렌드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은 흥미진진한 스토리, 흡입력 있는 캐릭터를 통해 드라마, 영화 시장 판도를 완전히 바꿨다.

장 감독은 '라이터를 켜라'(2002), '싸인'(2011), '끝까지 간다'(2013) 등에 참여했고, 김 작가는 '싸인'(2011), '유령'(2012), '시그널'(2016) 등을 집필해 '2016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드라마 부문 최고상인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극본, 연출로 스타 반열에 오른 두 사람이 지난 20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더 스토리 콘서트'에 참석해 창작 과정에 얽힌 많은 이야기를 공개했다.

◇ 드라마 '싸인', 장르물 아닌 로코였다

'싸인'부터 '시그널'까지…김은희표 장르물, 이렇게 탄생했다
2011년 메디컬 수사 드라마 '싸인'은 25.5%라는 높은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싸인'은 빠른 전개와 탄탄한 스토리로 기존의 뻔한 한국 드라마에서 벗어났다는 호평을 받았다.

'싸인' 이전 김은희 작가는 별다른 대표작이 없어 '장항준 감독의 아내'로 불렸다. 장 감독이 먼저 '싸인' 연출을 제안받았고 김 작가와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작품에 아내를 꽂았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야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장 감독은 김 작가의 '감'을 믿었다.

"소녀들이 백마 탄 왕자를 꿈꿀 때 제 아내는 무협지를 읽었어요. 다른 여성들과는 취향이 너무 달랐죠. 그렇게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다 보니 이 길을 처음 뚫은 사람이 됐어요."(장항준)

원래 장 감독은 여자 부검의와 형사의 사랑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는 사전 취재 도중 부검의라는 직업에 숭고함을 느끼게 됐다. 한국 드라마에서 부검의가 처음 소개되는 만큼 희화화하면 안 되겠다 생각했고, 결국 과학 수사극으로 방향을 틀어 '싸인'이 탄생했다.

◇ 김은희 "납치된 김혜수처럼 검은 봉지 써봤죠"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 드라마 '시그널' 속 조진웅과 이제훈이 나눈 무전이다. 김은희 작가는 이 대사 하나로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고 배우들의 출연을 결정지었다.

'시그널'은 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장르물이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토대로 해 시청자들의 큰 공감을 이끌어냈다.

사실 '시그널'의 시작은 평탄치 못 했다. 무전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다는 스토리가 시청자들을 이해시키기 힘들 것이라는 주장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 작가의 생각은 옳았다.

"김혜수의 실제 모델인 여자 경감이 있어요. 그분이 말한 가장 안타까운 사건이 바로 신정동 연쇄살인사건이었죠. 그 사건은 경찰의 수치이기 때문에 기사화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김은희)
'싸인'부터 '시그널'까지…김은희표 장르물, 이렇게 탄생했다
극 중 홍원동 연쇄살인사건은 신정동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살인범에게 붙잡힌 김혜수는 두 손이 묶이고 머리에는 비닐봉지가 씌워진 채 달린다. 이 장면을 위해 김 작가는 실제로 비닐봉지를 쓰고 달리는 두려움을 몸소 체험했다.

또 김 작가는 형사, 전직 프로파일러, 사건 생존자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영감을 받았다. 그들이 말한 사소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고 대본에 써 내려갔다.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기에 시즌 2를 바라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시그널'에 대한 애착이 큰 김 작가는 내년 하반기 방영 예정인 차기작을 마무리한 뒤, 시즌 2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한예진 한경닷컴 기자 geni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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