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삭은 맛…때론 시간이 맛을 내는 최고의 조리사
쿡방·먹방의 시대…KBS '한국인의 밥상'의 의미
최근 들어 쿡방과 먹방이 많아진 건 이런 자극보다는 도시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바쁜 삶에서 이런 프로그램들은 뚝딱 해서 먹거나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 한 끼를 해결하는 정보를 알려준다. 때론 힘든 일상에서 스스로에게 작은 힐링도 제공한다. 1인 가구가 늘어나고 핵가족화하면서 부모로부터 자연스럽게 터득하던 요리 노하우는 명맥을 잇기 어려워졌다. 그 대신 현대인은 인터넷에서 갖가지 레시피를 뒤져본다. 레시피를 봐야 비로소 요리가 되고, 레시피를 찾는 데 시간을 보내는 ‘레시피홀릭’도 음식 프로그램만큼 많아졌다.
이런 시대에 KBS ‘한국인의 밥상’은 이례적인 음식 프로그램이다. 2011년 시작할 때만 해도 지방을 찾아가 제철음식을 소개하는 또 하나의 음식 프로그램이 아닌가 오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인의 밥상’은 거창한 제목이 허명이 아니라는 걸 지난 5년간 증명해왔다. ‘한국인의 밥상’에서만 느껴지는 곰삭은 맛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7일 제작진이 찾은 곳은 ‘서해의 곳간’이라 불리는 충남 홍성이다. 이 가을 홍성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건 게, 새우, 낚지, 돼지고기 같은 식재료들이다. 고정 출연자인 최불암은 어김없이 오프닝에 등장해 풍요의 땅 홍성을 소개하고 새우잡이배에 직접 올라 갓 잡은 튼실한 새우를 그대로 살만 발라내 맛보는 모습을 보여준다. 새우젓이 익어가는 광천 토굴로 들어가 분홍빛의 새우젓도 소개한다. 그 긴 토굴이 순전히 정과 망치로 무려 4년간 장정들이 조금씩 뚫어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천수만의 지형적 이점 때문에 새우가 많이 나고, 그 새우를 이용한 음식과 사람의 손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광천토굴 새우젓 같은 재료가 생겨났다는 얘기가 물 흐르듯 이어진다. 음식이 지역의 특성,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직접 연결돼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한국인의 밥상’이 여타 음식 음식 프로그램과 달리 깊은 맛을 내는 것은 그 지역의 사람과 음식이 서로 닮아 있다는 걸 발견해내기 때문이다. 젊을 때 술을 많이 마셔 아내 속을 깨나 썩였다는 한 어르신이 이제는 아내를 위해 뭐든 하는 살가운 모습을 보여준 다음 노을이 지는 갯벌로 옮겨진 화면에 최불암의 내레이션이 얹힌다. “때론 시간이 맛을 내는 최고의 조리사입니다. 오래 한 솥에서 끓다 보면은 서서히 간이 맞고 감칠맛도 생기죠. 잘 곰삭은 새우젓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음식과 그걸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겹쳐 놓는다. 추수가 끝나고 나면 물을 뺀 둠벙에서 물고기를 잡아오곤 했다는 남편에 맞춰 동네에서 어탕국수의 일인자가 돼 한바탕 동네잔치를 벌이는 아내의 모습이 그렇다. 한국인의 밥상은 그 지역 사람들의 먹거리 보고서이자 그걸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고서다.
먹방, 쿡방이 쏟아내는 음식들 속에서 채워지지 않는 건 아마도 ‘시간’이 아닐까. 음식은 단지 눈앞에 있는 재료를 갖고 만들어내는 먹거리가 아니라 세대에서 세대로 시간의 더께를 얹어가며 쌓인 삶의 지혜가 아닐지. ‘한국인의 밥상’이 내놓는 음식들이 색다르게 다가오는 건 바로 그 음식을 통해 쌓인 사람들의 시간이 곰삭아 있기 때문이다.
정덕현 < 대중문화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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