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민정기 씨가 금호미술관에 걸린 자신의 작품 ‘遊 몽유도원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양화가 민정기 씨가 금호미술관에 걸린 자신의 작품 ‘遊 몽유도원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림은 역사를 담아내야 하고, 묘한 신비로움이 있어야 하며, 모든 사람이 공감해야 하고, 능통한 수완을 가져야 명품이 됩니다. 그림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탄생되는 것이죠. 그러니 지리와 역사, 문학적인 질감이 없으면 그림이 살아 움직이지 않습니다.”

13일부터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시작한 서양화가 민정기 씨(67)의 말이다. 민씨는 풍경과 인간의 삶의 터전을 인문학적 회화 형태로 풀어내는 민중화가.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1980년대 ‘현실과 발언’ 창립회원으로 활동하며 고단한 서민의 삶을 화폭에 옮겨왔다.

민씨는 작업실을 경기 양평으로 옮긴 1987년부터 자연의 건강함을 표방하며 ‘지리산수’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지리적 탐색과 역사 정신에 현대적 화풍을 융합했다. 2007년 이중섭미술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최근 경기 고양시 삼송리에 새 작업실을 마련한 그는 단순한 풍경화에서 벗어나 답사를 통해 잊혀진 옛 풍경을 캔버스에 수놓으며 새로운 변화를 주고 있다.

10년 만에 여는 이번 전시회 주제도 ‘잊혀진 경물을 찾아서’다. 조선시대 중국 베이징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임진나루부터 홍지문을 지나 경복궁 어귀로 이르는 길을 수백 번 걸으면서 잡아낸 서사적 풍경화 27점과 1980~1990년대 판화 55점을 내놨다.

그의 풍경화는 고지도, 주역, 풍수지리, 설화를 근거로 전통 한국화 준법들을 서양의 유화물감과 화필로 재구성한 독창적인 필법의 작품들이다. 북한과 마주한 풍경을 잡아낸 ‘임진리 나루터’를 비롯해 임진강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그린 ‘북악 옛길’, 안견의 ‘몽유도원도’의 배경을 바탕으로 그린 ‘유(遊) 몽유도원도’ 등 분단과 개발의 흔적, 역사적 이야기가 담긴 풍광을 화폭에 담았다. 옅은 수채 물감을 연상시키는 붓질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산세나 들판 풍경의 윤곽만을 스쳐 지나가는 여느 풍경화가와 달리 산과 계곡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그 지역 신화와 전설, 삶까지 용해되는 풍경화를 그려낸다. 지리학자인 최종현 전 한양대 교수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사라진 역사의 흔적도 화폭에 복원했다.

화업을 숙명으로 여기면서 사람과 자연, 역사를 조화시키는 인문학적 회화를 지향하는 그에게 답사는 그림의 배경에 해당한다. 그는 “주변을 아우르면서 총체적으로 사물을 봐야 풍경화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며 “폭넓은 시각을 갖게 되면 모든 게 더욱 풍성해진다”고 설명했다. 경치는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역사적 일화나 주변 사람의 삶을 각색하고 연출하면 더욱 빛이 난다는 얘기다.

그림을 시작한 1960~1970년대에는 철학적 근간이 확고하지 않았지만 칠순을 앞둔 지금은 어느 정도 미학적인 개념이 잡히는 것 같다고 그는 자평했다. 평생 발로 뛰고 가슴으로 색칠한다는 그는 “일반적으로 풍경화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켰다면 내 작품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역사가 하나가 된 게 특징”이라며 “그 풍경을 특이한 체취로 호흡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맛을 우려내려 한다”고 말했다.

풍경화와 함께 내건 판화 ‘한씨연대기’ ‘숲에서’ ‘숲을 향한 문’ 등은 사회를 향한 더욱 넓고 깊어진 고찰을 통해 나이가 들수록 무뎌지는 비판정신을 일깨워준다. 전시는 다음달 13일까지 이어진다. (02)720-5114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