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유럽의 한 국립극장과 공동 제작해 대형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는 민간오페라단 S사 대표는 요즘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협찬이나 관람권 구매를 구두로 약속한 기업들이 공식 계약을 미루고 있어서다. 기업 담당자들로부터 “9월28일부터 시행되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과 관련해 사내 법무팀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달라”는 답변만 되풀이해 듣고 있다. 그는 “공연 2~3개월 전에는 확정해야 하는 기업 협찬과 단체 구매로 제작비의 절반 정도를 채워야 하는데 난감하다”며 “이러다 공연이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클래식, 오페라, 뮤지컬 등 공연계에 비상이 걸렸다. 기업들이 공연 협찬이나 단체 관람권 구매를 미루거나 확 줄이고 있어서다. 김영란법의 선물 상한선(5만원)을 넘는 관람권 비중이 높은 대형 클래식·뮤지컬 공연시장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악! 김영란법…가을 대형 공연 어쩌나
오는 연말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을 올리는 한 뮤지컬제작사도 그동안 우수 고객 초청 행사를 함께한 금융회사들로부터 이번 공연에 대해서는 ‘확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제작사 관계자는 “오랜 기간 행사를 함께한 기업들도 계약을 미루고 있다”며 “워낙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공연인 데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어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일괄적으로 고객을 초청하는 행사는 공직자 언론인 교원 등 김영란법 적용 대상이 포함돼 있어도 법 위반이 아니라는 유권해석이 나왔음에도 기업들이 혹시나 저촉되는 부분이 있을까봐 몸조심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 공연업계 관계자는 “대형 뮤지컬·클래식 공연 매출에서 기업이 담당하는 비중이 20~50%를 차지한다”며 “기업 협찬, 구매가 크게 줄어들면 시장 자체가 무너질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금융업체와 통신업체, 유통업체 등 대기업들은 클래식·뮤지컬 시장의 큰손이다. 경쟁적으로 공연 관람권을 단체 구매해 고객 대상 마케팅과 거래처 접대 등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카드사나 통신사들은 공연 날짜를 몇 회 골라 전관 예약을 하고, 우수 고객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벌여 왔다.

◆기업 공연 협찬, 단체 구매 ‘위축’

악! 김영란법…가을 대형 공연 어쩌나
그랬던 기업들의 공연 지출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는 것은 홍보·접대용으로 쓴 관람권이 자칫 ‘뇌물’로 간주돼 법에 저촉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29일 공직자, 언론인, 사립학교 교원 및 그들의 배우자에 대한 선물 가액 한도를 5만원으로 확정했다. 대형 클래식 공연의 경우 매출의 60%, 뮤지컬은 80%가 5만원 이상 관람권에서 나온다.

공연마다 다르지만 기업 단체 구매는 관람권 판매량의 20~30%로 추정된다. 클래식이나 오페라 공연에선 유료 관객의 절반 이상을 기업 협찬 초대권 및 단체 구매로 채우는 경우도 많다. 이들 공연이 김영란법의 직접적인 타격을 맞게 된 이유다.

금융사 등 일부 기업은 김영란법 시행을 계기로 문화 마케팅이나 공연 후원을 축소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A은행 관계자는 “메세나 활동의 일환으로 매년 3억원가량의 예산을 책정해 뮤지컬과 전시회 등을 후원하고 관람권을 받아 VIP 고객 등에 제공했으나 김영란법 시행 이후 지원 축소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밝혔다.

B은행 관계자는 “공연 등에 지원하면서 비공식적으로 관람권을 받고 이를 주요 고객에게 선물해왔으나 앞으로는 대부분 관람권이 5만원 이상이어서 그러지 못할 것”이라며 “공연 후원을 전면 중단하지는 않겠지만 규모는 줄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민간 공연 기획·제작사 ‘위기’

공연계에서는 재무사정이 좋지 않은 민간 공연기획·제작사 중 일부는 ‘존폐기로’에 놓일 것이라는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뮤지컬 ‘캣츠’ ‘오페라의 유령’ ‘위키드’ 등을 제작한 설앤컴퍼니의 설도윤 대표는 “공연 매출이 100억원이라고 가정했을 때 20억~30억원은 기업 단체 구매에서 나왔는데, 이런 구매가 급격히 줄어들면 수익을 내는 공연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8일 막을 내린 대형 뮤지컬 ‘위키드’는 지난 시즌과 비교했을 때 기업 단체 구매가 15% 정도 줄었다. 지방 공연의 경우 기업 단체 구매가 10분의 1 수준으로 현저히 줄었다.

뮤지컬 등에 비해 개별 관객층이 얇은 클래식·오페라 등 순수 예술 시장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한 클래식 공연계 관계자는 “유료 관객의 50%가량을 기업 협찬에 의존하고 있는 클래식 공연계는 한쪽 시장 자체가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민간 기획사들은 당장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신규 관객들이 클래식에 입문하는 ‘통로’가 됐던 초대권이 사라지는 것도 문제다. ‘조성진 신드롬’으로 이제 막 달아오르기 시작한 클래식 시장에 김영란법이 대형 악재로 작용하는 셈이다.

◆‘문화 접대’ 활성화하라더니…

공연계에선 김영란법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했던 문화 접대 활성화와 상충되는 ‘규제 법안’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체부는 2007년부터 거래처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 접대비’의 경우 세법상 비용으로 인정해주는 등 기업의 문화 소비 활성화를 적극적으로 장려해왔다. 설 대표는 “지금까지 문화 접대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다가 이와 정반대되는 규제가 나온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박삼구 한국메세나협회 회장(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도 김영란법 합헌 결정이 나기 전 한 공식 석상에서 “지인을 초청해 함께 연극을 보고, 노래를 듣는 ‘문화 접대’는 김영란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해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와 관련해 문체부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의견이다. 문체부 관계자는 “김영란법 적용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고가 공연시장의 타격이 예상되는 것은 사실이나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며 “거래처를 대상으로 한 문화 접대는 줄어들겠지만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문화 회식 캠페인’을 통해 새로운 문화 수요가 창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골프, 음주로 흘러들어갔던 접대를 출판·연극 등 중저가 문화시장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공연계 관계자는 “클래식 업계 등 고가 공연 피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며 “기업의 문화 회식이 활성화돼도 공연 수요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재연/김희경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