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윤준필 기자]
조슬기

조슬기

기승전결(起承轉結). 동양의 전통적인 시작법 중 하나로, 작품 내용의 흐름을 뜻한다. 오늘 날 온라인상에서는 ‘기승전XX(결국엔 XX더라)’로 변형돼 자연스런 흐름을 강조하는 말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에 감히 ‘기승전-’을 붙이고 싶은 배우가 있다.

문근영은 SBS ‘마을-아치아라의 비밀’ 제작발표회에서 “이번 작품으로 성인 연기자의 입지를 다지는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문근영을 여전히 ‘국민 여동생’으로 기억하고 있는 대중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해프닝(?)이었다. 문근영은 한 번도 ‘국민 여동생’에 안주한 적이 없다. ‘국민 여동생’이란 별명을 얻은 2004년부터 천천히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그렇다고 급작스럽게 자신의 이미지를 뒤집진 않았다. 꾸준히 새로운 캐릭터를 선택했고, 경험해보지 않은 영역으로 발을 넓혔다. 남장에 도전하고, 이미지를 뒤엎고, 연극 무대에 올랐고, 조연을 선택했다. ‘국민 여동생’으로 대중들 앞에 선 원석은 10년이란 긴 시간동안 천천히 자신을 쪼개고, 다듬어 ‘여배우’란 보석이 됐다. 매일 아침 팬들에게 ‘곰모닝’을 외치는 여배우 문근영의 ‘기승전결’을 살펴보자.

어린신부 문근영

어린신부 문근영

일어날 기(起) : 2004년 영화 ‘어린신부’ 서보은
‘어린신부’는 문근영에게 더 이상 ‘00의 아역’이란 수식어를 뗄 수 있게 만든 작품이다. 문근영은 ‘가을동화’, ‘명성황후’, ‘장화, 홍련’ 에서 보여준 적 없었던, 밝고 가볍고 귀여운 이미지를 맘껏 뽐냈다. 특히, 상민(김래원)을 보기 위해 예비군 훈련을 간 보은이 상민을 괴롭히는 해병대 고참을 향해 “그래, 마누라다! 야, 니가 뭔데 우리 오빠한테 그러는 거야? 빨리 사과해!”라고 당돌하게 외치는 장면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예비군 훈련이 끝난 뒤 상민과 함께 간 노래방에서 ‘난 아직 사랑을 몰라’를 부르는 깜찍하고 발랄한 톡톡 튀는 연기 역시 ‘어린신부’하면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 영화 ‘어린신부’가 ‘태극기 휘날리며’에 이어 그해 흥행 2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문근영의 활약 덕분이었다.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문근영의 매력에 수많은 삼촌 팬들이 생겼고. 문근영의 대표 별명인 ‘국민 여동생’ 역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바람의화원 문근영

바람의화원 문근영

이을 승(承) : 2008년 SBS ‘바람의 화원’ 신윤복
문근영은 ‘어린 신부’ 이후 꾸준히 스크린에서 활약하며 ‘국민 여동생’의 이미지를 천천히 벗어 던졌다. ‘바람의 화원’은 스크린에 이어 브라운관에서도 문근영이 성인 연기자로 확실히 자리매김하는 기회였다. ‘남장여자’라는 당시 흔하지 않은 콘셉트를 문근영은 훌륭히 소화해내며 자신의 연기력을 입증했다. 생기 넘치는 ‘남장여자’ 신윤복을 통해 시청자들은 여자 신윤복이 남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여자를 보는지, 김홍도(박신양)를 만나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볼 수 있었다. 또한, 기생 정향 역의 문채원과는 ‘닷냥커플’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이전까지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여여케미’ 선보이며,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두 사람은 그해 SBS 연기대상에서 베스트 커플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문근영은 ‘바람의 화원’으로 연기대상까지 수상. 문근영은 만 21세에 연기대상을 수상함으로써 방송 3사 통틀어 최연소 연기대상 수상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KakaoTalk_20151127_092148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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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꿀 전(轉) : 2010년 KBS2 ‘신데렐라 언니’ 송은조/구은조
문근영이 2년 만에 ‘신데렐라 언니’로 대중들과 만났다. 그것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동화 ‘신데렐라’를 신데렐라 언니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신데렐라 언니’에서 문근영은 자신에게 ‘선한 얼굴’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보여줬다. 문근영은 생활력 없는 엄마 밑에서 이리저리 전전긍긍하며 자라난 은조 역을 맡아,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효선(서우)과 신경전, 애증, 성장과 화해를 보여줬다. 효선을 향해 내뱉는 독설과 냉소는 문근영의 따뜻한 이미지를 기억하는 팬들에겐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으나, ‘신데렐라 언니’는 문근영의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준 계기가 됐다. 문근영의 차가운 얼굴만큼이나 화제를 모았던 것이 오열 연기였다. 죽은 새아버지 영정 앞에서 자신의 지난 잘못을 자책하고, “용서해주세요 아빠”라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문근영의 연기는 시청자들의 가슴을 울리기에도 충분했다.
마을 문근영

마을 문근영

맺을 결(結) : 2015년 SBS ‘마을-아치아라의 비밀’ 한소윤
‘신데렐라 언니’가 문근영의 다른 색을 찾아준 작품이었다면 ‘마을’은 디테일한 연기를 펼치는 문근영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제작발표회에서 문근영은 “사건 중심의 드라마라 내 캐릭터가 뚜렷하지 않다. 최대한 내 모습 그대로 자연스러움이 묻어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나로 하여금 시청자들이 같이 비밀을 파헤치고 극에 이입될 수 있도록 연기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근영의 말처럼 한소윤은 아치아라의 외곽에서부터 ‘마을’이 숨기고 있는 비밀의 중심으로 향해 걸어가는 역할이다. 문근영은 초반 감정을 절제하는 연기로, ‘마을’의 다른 주인공들이 활약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한소윤은 진실에 집착하는 민폐 여주인공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을’ 속 아치아라가 허울뿐인 평화를 강조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공간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다시 한소윤을 들여다보면 문근영이 얼마나 디테일한 연기를 펼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마을’ 14회에서 소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연쇄살인범 ‘아가씨’를 집안으로 들이고 그에게 물 한 잔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문근영은 파르르 손을 떨며 아가씨에게 물 컵을 건넨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이기고, 진실에 다가가고 싶은 소윤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문근영은 진실 바깥에 있었던 한소윤이 ‘아치아라’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중심에 걸어 들어가며 생기는 감정의 변화를 세밀한 연기로 보여주고 있다.

‘마을’에서 문근영은 한 발 뒤로 물러나 다른 캐릭터가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작품을 위한 선택이었다. 또한, 시청자들에게 진실에 다가가고 싶은 한소윤의 작은 감정까지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17년차 여배우 문근영은 작품을 위해서라면 단 한 컷에 출연하더라도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준비가 돼 있다. 이제 문근영이 장착할 다음 무기는 무엇일까. 지금보다 진일보한 문근영을 기대해본다.

윤준필 기자 yoon@
사진. 영화 ‘어린신부’, KBS2 ‘신데렐라 언니’, SBS ‘바람의 화원’, ‘마을-아치아라의 비밀’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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