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대관령 삼양목장에서 만쥬한봉지
강원도 대관령 삼양목장에서 만쥬한봉지
강원도 대관령 삼양목장에서 만쥬한봉지

(파트2에서 이어옴) 서울재즈아카데미에 입학한 최용수는 곡 작업과 연습에 매진했지만 동료들의 음악수준을 쉽게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대학에선 음악을 좀 한다고 자부심을 가졌는데 그곳에서 저는 한마디로 하층민이더군요.(웃음) 그래도 음악을 제대로 배우려는 마음에 수업료 마련을 하기 위해 동네 중학교 보습학원 수학강사 일을 했습니다.”(최용수) 독하게 마음먹은 그는 음악 내공을 배양하기 위해 안면몰수하고 학우들과 교수들을 따라다니며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 당시 전통화성학 수업을 했던 김은영 선생은 그에게 오케스트라 편곡을 아무 조건 없이 가르쳐주었던 고마운 은사였다.

서울 상암동 노을공원에서 만쥬한봉지
서울 상암동 노을공원에서 만쥬한봉지
서울 상암동 노을공원에서 만쥬한봉지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성균관대로 복학한 최용수는 김은영 선생이 조감독으로 일했던 뮤지컬 음악 팀에 들어가 학업과 음악관련 일을 하는 이중생활을 했다. 그는 2년 넘게 일을 하는 동안 많은 선배 음악인들과 인연을 맺으며 경험을 쌓았다. 이후 최용수는 뮤지컬이 아닌 다른 음악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팀을 나왔다. 노래방 반주, 게임음악, 편곡, MR작업 등 온갖 음악관련 일을 시작해 제법 짭짤한 수입을 올리면서 욕심이 생겨났다.

서울 상암동 노을공원에서 만쥬한봉지
서울 상암동 노을공원에서 만쥬한봉지
서울 상암동 노을공원에서 만쥬한봉지

2010년 대학을 졸업한 최용수는 한 가수의 음반 제작자로 변신했지만 쫄딱 망해버렸다. 첫 단추에서 심각한 좌절을 맛본 대가는 가혹했다. “6개월 동안 빈둥거리다보니 앞으로 뭘 할까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고민을 하다 2011년에 그린플러그드 페스티벌을 보고 밴드결성을 결심했습니다. 잘 하는 분야가 ‘팝’ 스타일이란 생각에 밴드의 메인 사운드는 피아노를 염두에 두었습니다.”(최용수) 그는 2009년에 자신에게 미디음악을 배웠던 한준희에게 밴드결성을 제안했다. 마침 진로문제로 고민 중이던 한준희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준희 어린시절 사진
한준희 어린시절 사진
한준희 어린시절 사진

건반, 멜로디언을 차분하게 연주하며 밴드의 중심 사운드를 이끄는 한준희는 전남 순천시의 교육자 집안에서 2남 중 막내로 1985년 1월 2일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말수가 적었던 그는 몸이 허약했다. 늘 비염에 시달렸던 한준희는 성장을 하면서 청력이 점점 약해져 더욱 내성적인 아이로 변해갔다. “어릴 때 몸이 약해 밖에서 친구들과 뛰어 노는 것보다 주로 집에서 TV를 보거나 컴퓨터와 오락기로 게임을 하며 지냈습니다.”(한준희)

한준희 초등학교 시절
한준희 초등학교 시절
한준희 초등학교 시절

순천 조례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머니의 권유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성가대 피아노 반주자로 활동하고 음악경연대회에서 입상하는 등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피아노학원에 다니기가 싫어 그만뒀다가 다녔다가, 또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솔직히 당시에는 음악학원에 다니는 것이 축복인줄 몰랐어요. 순천대 교수인 아버지는 가끔 집에서 기타나 피아노를 치며 흥얼거리며 노래를 하셨고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어머니는 어린 시절에 그림을 잘 그리셨지만 재능을 살릴 기회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제가 예술 쪽으로 성공하길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한준희)

오뙤르 에반스라운지 공연에서 만쥬한봉지 한준희
오뙤르 에반스라운지 공연에서 만쥬한봉지 한준희
오뙤르 에반스라운지 공연에서 만쥬한봉지 한준희

전학을 간 부영초등학교에서 5학년을 맞은 해에 첼로를 배운 한준희는 학교 관현악합주부에 들어가 예술제에도 참가했다. “그 때는 첼로 연주에 관심이 많아 세계적으로 유명한 첼리스트들의 연주를 TV로 보거나 CD를 사서 열심히 들었습니다. 특히 로스트로포비치의 바흐 무반주곡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미샤 마이스키, 요요마, 장한나처럼 훌륭한 첼로 연주자 되고 싶었습니다.”(한준희) 순천 연향중학교 입학하면서 음악에 대한 흥미를 잃은 그는 또 음악학원을 그만뒀다. 주말마다 열심히 갔던 교회에도 나가지 않으면서 음악과 멀어졌다.

한준희 고등학생 시절 사진
한준희 고등학생 시절 사진
한준희 고등학생 시절 사진

당시 한준희는 급격하게 밀려든 일본문화에 관심이 지대했다. 일본애니메이션 OST, 게임, 드라마 배경음악에 빠져든 그는 광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히사이시 죠, 미조구치 하지메, 칸노 요코 등 유명 작곡가들처럼 음악PD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음악공부를 하려니까 쑥스러웠지만 용기를 내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음대 입시준비를 시작했습니다.”(한준희) 학교 친구들이 ‘음대를 가서 뭐하냐?’는 핀잔을 줬지만 쉬는 시간에 화성학 문제집을 공부하고 야간 자율학습시간에는 집으로 와 열심히 피아노 연습을 했다.

만쥬한봉지 1집 발매기념공연에서 한준희
만쥬한봉지 1집 발매기념공연에서 한준희
만쥬한봉지 1집 발매기념공연에서 한준희

국민대 음악학부 작곡과에 합격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대학에 들어가니 모든 것이 생소해 적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무조건 창작곡을 쓰고 연주해야 학점이수가 되었는데 제출마감일을 지키는 것부터 힘들었죠. 소심한 성격 때문에 연주자를 제대로 연습시키지 못해 교수님에게 혹평을 듣기도 했습니다.”(한준희) 충격을 받은 그는 입에 댄 적도 없던 담배를 질끈 물기도 했다. “담배를 처음 펴보니 마음은 평온은 불과하고 기침이 나서 너무 불편하더군요. 저는 술은 마시지만 지금도 담배는 피지 못합니다.”(한준희)

강원도 강릉 선교장에서 만쥬한봉지
강원도 강릉 선교장에서 만쥬한봉지
강원도 강릉 선교장에서 만쥬한봉지

음대에 진학했지만 재능이 부족해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불안감이 밀려왔다. 진로변경을 고민했을 정도로 방황했다. 점차 대학생활에 흥미를 잃어 휴학까지 생각했던 그때 아는 형과 함께 대중음악 공연장에 다니다가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록 카페 모임에 들어갔다. 그때 경험한 오아시스, 데프톤즈, 디앙그레이, 넥스트, 노브레인, 김창완, 이상은 등의 공연은 깊은 감명을 안겨주었다. “3학년 때, 대중음악 공연을 보고 자극을 받아 쓴 창작곡이 교내 예술제에서 입선하면서 다시 의욕이 생겨나더군요.”(한준희)

경포호수 노을 아래 만쥬한봉지
경포호수 노을 아래 만쥬한봉지
경포호수 노을 아래 만쥬한봉지

이후 기타를 배운 한준희는 교회 찬양단 활동을 시작했다. 무용축제에도 나가면서 미디음악을 배울 필요를 느꼈다. 2009년 대학후배 소개로 최용수를 만나 미디음악을 배웠다. 대학졸업 후, 교회성가대 편곡자, 공연PD일을 시작했지만 돈 벌이가 되지 않았다. 틈틈이 공모전에도 참가했지만 매번 고배를 마셨다. 경제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미디음악 스승인 최용수가 밴드결성을 제의해 왔다. “예전에 동두천 록페스티벌, 자라섬 국제재즈페스티벌, 월드디제이페스티벌에 놀러가서 본 아티스트들이 너무 멋있어 무대에 서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음악을 접기 전에 밴드생활은 한 번 해봐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한준희)(파트4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편집. 이은호 기자 wild37@tenasia.co.kr
사진제공. 한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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