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원, 옛 필름 450편 확보…한국 영화史의 공백 메웠다
“스물네 살 때 젊은 감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당시 한창 유행했던 액션영화에서 벗어나 어머니를 생각하며 인간애의 회복을 그리려고 했어요. 만약 이 영화가 실패했다면 정진우라는 영화감독은 없었을 겁니다.”

정진우 감독은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1963년 개봉한 자신의 데뷔작 ‘외아들’의 필름을 찾았다는 사실에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이 영화는 어촌마을에서 태어난 인철(최무룡)이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어머니(황정순)를 설득해 홀로 상경한 뒤 겪는 이야기를 담았다. 황정순, 최무룡, 김지미 등 당대 최고 배우들이 열연했다.

이병훈 한국영상자료원장은 이날 “1974년 영상자료원이 문을 연 이래 최대 규모의 미보유 필름을 찾았다”며 “그동안 유실돼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던 1949년부터 1981년까지 한국 극영화 94편을 포함해 총 450편의 필름을 기증받았다”고 말했다.

기증자는 1970년대 종로에서 순회영사 사업을 했던 한규호 연합영화공사 대표다. 한 대표가 영화 필름 배급업체 10여곳을 통합해 설립한 연합영화공사는 당시 TBC MBC KBS 등에 방송용 16㎜ 영화필름을 납품할 만큼 성업했다. 한 대표는 순회영사 사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필름 배급업을 정리하면서 당시 수집한 다량의 영화필름을 폐기하지 않고 개인 소유 창고 여러 곳에 보관해오다 영상자료원에 기증했다.

기증받은 필름은 정 감독의 ‘외아들’을 비롯해 노필 감독의 ‘안창남 비행사’, 최초의 여성 시나리오 작가 출신인 홍은원 감독의 ‘여판사’, 최하원 감독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 등 거장 감독의 데뷔작 4편과 이만희, 임권택, 김수용 등 당대 최고 감독의 작품을 포함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오래된 노필 감독의 ‘안창남 비행사’(1949년)는 국내 최초로 조종사를 소재로 만든 극영화다. 전체 분량의 3분의 1인 28분가량만 남아 있다. 1950년대 작품으로는 윤봉춘 감독의 ‘처녀별’, 양훈 양석천 김희갑 등이 출연한 권영순 감독의 코미디 영화 ‘오부자’, 김화랑 감독의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 등이 있다.

이만희의 ‘잊을 수 없는 연인’, 김수용의 ‘만선’, 임권택의 ‘전장과 여교사’, 대만에 수출해 인기를 끈 강범구 감독의 ‘안개낀 거리’ 등 1960년대 작품도 다수 있다. ‘만선’은 김수용 감독이 가장 아끼는 작품 중 하나다. 1970년대 작품으로는 이규웅 감독의 ‘꼬마신랑’, 전우열 감독의 ‘팔도식모’, 박구 감독의 ‘못잊어’, 신경균 감독의 ‘홍콩 부르스’, 남석훈 감독의 ‘정무문(속)’ 등 통속극과 액션물이 많다. 신상옥 감독의 ‘13세 소년’도 포함됐다.

이 원장은 “이번 기증으로 한국영화 보유율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한국 영화사에 부족한 사료를 상당히 확보하게 됐다”고 의의를 밝혔다. 이번 자료들은 기증자의 요청에 따라 영상자료원에서 관리할 방침이다.

영상자료원은 오는 23일 이만희 감독 타계 40주기를 맞아 ‘잊을 수 없는 연인’ 공개를 시작으로 정 감독의 ‘외아들’, 임권택 감독의 ‘전장과 여교사’, 김수용 감독의 ‘만선’, 최하원 감독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 등 다섯 편을 올해 일반에 선보일 예정이다.

유재혁 대중문화전문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