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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걸그룹이랑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선병맛 후중독’이라고 팬 분들이 지어주셨는데 후중독이란 말이 정말 감사했어요. ‘빠빠빠’를 처음 들었을 때 만화주제곡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독수리 5자매’ 같은 느낌을 주려고 헬멧 아이디어를 제안했죠. 그때 동의한 멤버도 있고, 긴가민가한 멤버도 있었고… 왜냐면 트레이닝 복도 그렇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걸그룹으로서는 처음 시도하는 것이니까요. 헬멧을 시작으로 첫 콘셉트가 잡히니까 그 뒤로 아이디어가 쭉쭉 나왔어요.”(크레용팝 텐아시아 인터뷰 中)

지금 크레용팝의 위상은 가히 무서울 정도다. ‘직렬 5기통 춤’을 원더걸스의 ‘텔미 댄스’와 비교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따까치 원’이라고 외치는 ‘빠빠빠’ 노래 첫 소절만 들어도 머릿속에는 철모 쓰고 교차로 점프하는 씩씩한 소녀들이 떠오른다. ‘팝저씨’(크레용팝을 따라하는 아저씨 팬)들로 시작된 소소한 열기는 ‘빠빠빠’ 음원차트 역주행으로 이어졌고, 지금은 투애니원, 엑소, 에프엑스 등 대형 기획사의 매머드 급 아이돌그룹들과 함께 당당히 음원차트 1위를 다투고 있다. 이게 웬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인가?

크레용팝은 일종의 ‘콘셉트 돌’이다. 교복치마 안에 ‘추리닝’을 입고, 헬멧을 쓰면서부터 범상치 않은 콘셉트가 잡혀나갔고, ‘빠빠빠’에서 비로소 결실을 거뒀다. 사실 크레용팝의 초기 모습은 보통의 걸그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생회사였던 소속사 크롬 엔터테인먼트도 여타 기획사와 마찬가지로 전문 스타일리스트 등 다수의 제작진을 고용해 크레용팝을 만들기 시작했다. 출발 당시 일반 아이돌그룹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크레용팝 데뷔곡 ‘Saturday Night’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크롬엔터테인먼트의 대표는 기존의 전문 스타일리스트를 자르고, 대신 자신과 멤버들의 의견을 반영해 새로 콘셉트를 짰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의 ‘병맛’ 콘셉트가 나오기 시작한 것. 이러한 크레용팝의 모험은 ‘결과론적으로 말해’ 새로운 걸그룹의 코드를 선보이게 됐다. 만약에 크롬엔터테인먼트가 기존의 걸그룹 트렌드를 따랐다면, ‘직렬 5기통 춤’이라는 전대미문의 퍼포먼스는 아예 탄생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디어의 승리인 셈.

크레용팝의 인기는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작게 보자면 그저 코믹 코드가 화제를 부른 것 정도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크게 보면 일종의 ‘다른 방향성’으로 확대해볼 수 있다. 과거를 잠시 돌아보면, 지난 2007년에 등장한 원더걸스의 ‘텔 미’는 걸그룹 포맷이 단지 10대의 소유물이 아닌, 국민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후 소녀시대의 ‘Gee’,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아브라카다브라’ 등은 걸그룹의 음악도 웰 메이드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은 어떤가? 일부를 제외한 걸그룹들은 섹시함과 귀여움 중 택일하는,익숙한 코드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눈길을 끌기 위해 점점 야해지는 것이 대부분의 (어쩌면 가장 쉬운) 선택이다. 결과적으로 그다지 신선한 모습은 찾기 힘들다. 이는 아이디어 부재가 나은 결과다. 바로 이러한 때 대중은 크레용팝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 여타 걸그룹과 차별화된 즐거움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이를 ‘오타쿠’의 승리로 보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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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걸그룹에 대해 ‘선병맛 후중독’이란 표현을 쓴 것은 SM엔터테인먼트의 에프엑스(f(x))가 크레용팝보다 먼저다. 에프엑스에 대한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장난스럽게 말하면 ‘아스트랄, 병맛’의 걸그룹, 거창하게 말하면 대안의 걸그룹. (물론 에프엑스의 ‘병맛’은 크레용팝의 ‘병맛’과 개념이 전혀 다르다. 에프엑스가 고도의 숙련을 전제로 하고 독특함을 가미했다면, 크레용팝은 우연의 아이디어로 신선함을 준 것이다) ‘땀 흘리는 외국인은 길을 알려주자, 너무 더우면 까만 긴 옷 입자’와 같은 가사는 10대 팬들에게 ‘병맛’으로 다가왔지만, 어느 때인가부터 새로운 세계관으로 비쳐졌다. 에프엑스의 ‘병맛’은 어쩌면 ‘첨단’의 다른 말이었다.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10대들의 언어를 가사로 쓰기 시작했고, 그것을 꽤 음악적으로 풀어나갔다. 가사가 ‘아스트랄’했다면 사운드는 훌륭했고, 어떤 면에서 소녀시대보다 진취적이었다. 에프엑스가 평론가 및 힙스터들이 무척 아끼는 몇 안 되는 걸그룹이 된 이유는 바로 음악적인 완성도를 기본 바탕으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에프엑스가 최근 발표한 정규 2집 ‘Pink Tape’은 ‘병맛의 아이콘’이 ‘대안의 걸그룹’으로 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Nu ABO’, ‘Hot Summer’, ‘Electric Shock’ 등에서 보여준 에프엑스 식의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은 새 앨범 타이틀곡 ‘첫 사랑니’에서 대중과의 접점을 찾은 듯하다. 핑크색 VHS비디오 모양의 음반 디자인처럼 전에 없던 복고적인 스타일도 느껴진다. ‘첫 사랑니’, ‘Kick’이 기존의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노선을 발전적으로 이어가고 있다면 ‘시그널’, ‘Airplane’과 같은 곡들에서는 전형적인 디스코, 신스팝을 선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복고는 친숙함으로 다가온다. SM엔터테인먼트는 소녀시대로 최고를 달리는 사이 에프엑스를 통해 여러 가지를 실험했다. ‘Pink Tape’에서는 비로소 실험을 끝내고 힙스터를 넘어 더 많은 대중들에게 다가가려는 의도가 읽힌다. 이제는 최고의 걸그룹 자리를 소녀시대에서 에프엑스에게 물려주려는 것일까? 수많은 걸그룹이 우왕좌왕 할 때 에프엑스와 크레용팝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걸그룹의 미래를 제시해버렸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말이다.

글, 사진.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제공. SM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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