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 즉 색은 세상에 대한 찬미의 수단입니다. 우리 산하를 이불처럼 물감으로 덮고 싶어요. 두껍게, 아주 두껍게 말입니다.”

올해 쉰세 살이지만 아직도 어린 왕자 같은 눈빛을 간직하고 있는 화가 사석원 씨(53).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고 있는 그는 “전국 곳곳의 폭포를 다 아우르며 낯선 산 위에 영원히 서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강한 붓질로 폭포의 소리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동국대에서 한국화를 공부한 그는 핑거 페인팅 작가 오치균 씨와 함께 50대 ‘블루칩 작가’로 꼽힌다. 박수근 이대원 이우환 김종학 등 인기 작가들보다 화력(畵歷)은 짧지만 많은 애호가들을 확보하고 있다.

그는 2007년 금강산의 사계를 그린 ‘만화방창’, 2010년 아프리카 케냐와 탄자니아 여행 뒤 동물을 소재로 한 ‘하쿠나 마타타’ 전시 이후 백두산 오대산 설악산 계룡산 등 전국 명산 100여곳의 폭포를 찾아 그 웅장한 물줄기를 채색해왔다.

폭포를 화제로 선택한 이유는 뭘까. 그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즐겨 놀던 경기도 포천 비둘기낭폭포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양장점을 하는 바람에 경기 포천의 외가에서 살았는데 그때 봤던 비둘기낭폭포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아요. 비둘기낭폭포는 조금 낮은 지대에 있는데 비가 오면 매우 미끄러웠죠. 내년에 폭포 주변이 수몰될 예정이어서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그는 “폭포를 찾으러 산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미인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처럼 보인다”며 “실제로 체험해보지 않으면 그 마력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전국 명산들을 여행한 뒤의 폭포 연작은 동물, 꽃그림보다 더 강렬해졌다. 약한 듯하나 큰 힘을 지닌 폭포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쇼윈도에 장식용으로 걸려 있을 법한 아주 큰 붓으로 두껍게 한 번에 붓질했다고 한다. 폭포의 생명력을 넘어 폭포의 슬픈 운명까지 담아내기 위해서다.

기억에 새겨진 폭포들을 옮겨 놓은 화폭은 하나같이 강렬한 원색 너머로 생명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그는 “동양화는 흰색을 표현할 때 먹을 쓰지 않고 비우는 방법을 쓰지만, 폭포 그림은 서양화이기에 ‘폭포의 소리’를 그리고 싶어서 흰색을 더욱 두껍게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폭포를 다루면서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의도다.

여름과 봄의 구룡폭포를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묘사한 ‘금강산 구룡폭포’에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파란 부분과 노란 부분은 실제로는 화강암이지만, 감정을 넣어 색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걸 삼킬 만큼 에너지가 큰 폭포죠.”

철원의 삼부연폭포를 묘사한 작품은 동양적인 미감을 살려낸 것. “등산을 싫어하는데 삼부연폭포는 길 옆에 바로 있더군요. 삼부연폭포를 서양 재료로 정선의 한국화처럼 그렸습니다. 뾰족하고 험악한 바위와 산을 도끼로 찍어내린 것 같은 부벽준법을 쓴 뒤, 양 옆 부분은 유화의 마티에르로 처리했죠.”

‘토끼와 폭포’는 서귀포에 있는 엉또폭포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엉또폭포는 평상시에는 건천인데 비가 50㎜ 이상 오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틀 정도 지나면 건천으로 돌아가는 신기한 폭포예요.”

‘덕유산 칠연폭포’ ‘설악산 천불동 계곡 오련폭포’ ‘금수산 용담폭포와 황소’에 대해서도 그는 “폭포를 보면서 부드러운 물살이 단단한 바위를 뚫는 힘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의 그림은 유채를 팔레트에 개지 않고 바로 화폭에 찍어발라 질감이 거칠고 원색적인 게 특징이다. 한국화와 유화를 오가며 원색물감을 화면에 바르고 마구 뿌리는 기법으로 폭포를 그린 것. 작업할 땐 물감이 흐르기 때문에 눕혀서 수십 개의 물감을 짠 뒤 붓질을 한다.

“유화물감은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산을 사용하는데 막바지에 작업이 고조될 때 물감이 떨어지면 곤혹스럽죠. 물감이 수입되자마자 공항에 물감을 픽업하러 간 적도 있습니다. ”

‘산중미인’을 주제로 내달 3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서는 폭포연작 40여점을 만날 수 있다. (02)720-102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