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자 "연기할 때만 나오는 힘이 있나봐요"
김혜자는 여러 차례 "다들 나를 알잖아요"라는 말을 했다.

오랜 연기 경력이나 출연작의 시청률에 대한 말을 넘어 고정된 연기를 염려하는 배우의 한숨이 섞인 말이다.

'마더'는 '아들을 구하려 뛰는 엄마'라는 단순한 줄거리로 설명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애처로움과 섬뜩함 사이를 순간에 오가는 엄마의 표정을 보면, 봉준호 감독이 왜 그렇게 김혜자에게 끈질기게 구애했는지와 김혜자가 왜 봉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두 질문에 대한 답이 동시에 나온다.

짐승 같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고 폭우를 뚫고 달리며 갈대밭에서 기묘한 공기에 둘러싸여 춤을 추는 것은 김혜자만 가능한 연기이며, 김혜자가 '한국의 어머니상'이라는 테두리에서는 보여줄 수 없었던 연기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칸에서 돌아와 21일 오후 서울 용산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김혜자는 기존 TV 드라마에서와 다른 어머니로 연기 변신을 한 것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며 "일상적인 엄마에 지쳐 있었다"고 말했다.

"드라마 '여(女)'나 '사랑이 뭐길래', 김정수 작가 시절 '전원일기' 같은 드라마를 빼면 엄마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너무 일상적이었어요. 저는 늘 다중적인 인간을 그린 작품을 하고 싶었어요.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데… 다행히 '마더'에는 내가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았어요.대본을 읽으며 봉준호라는 감독이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었죠."

"내가 관객이라도 TV에서 보던 모습 뭐하러 극장에서 돈 내고 보겠느냐"고 반문한 김혜자는 출연할 만한 영화가 오자 주저없이 자신을 내던졌고, 봉 감독도 거침없이 극한의 감정을 주문했다.

그렇지 않아도 연기를 할 때면 "주변에 보이지 않는 막이 둘러지는" 김혜자는 '마더'를 찍으며 진심으로 도준(원빈)의 엄마가 됐다. 촬영하는 동안 원빈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팠고, 봉 감독은 '컷'을 외친 이후에도 그대로 영화 속에 남아 있는 김혜자가 쓰러질까 걱정돼 말릴 정도였다.

"연기할 때는 실제로 느껴요.저는 컷이 안 돼요. 한참동안 거기에 있죠. 감독이 한 장면에서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라는데 형언할 수 없는 표정 도대체 어떤 걸 지으라는 거야.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한 것 같지가 않아서 감독은 '오케이' 했는데도 캠핑카로 돌아와서 울었어요."

봉 감독이 위로하러 캠핑카로 들어왔지만 김혜자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문자 메시지로 하라며 돌려세웠고, "성에 안 차겠지만 세상이 환호할 때는 인정하세요"라는 메시지를 받고서야 겨우 마음을 풀었다.

김혜자는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 기분, 아들 도준에 대한 애증을 모두 느꼈고 "복잡한 생각도 많았지만 심플하게 연기했다"고 설명했다.
김혜자 "연기할 때만 나오는 힘이 있나봐요"
"그림도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잖아요? '마더' 얘기 들었을 때, 시나리오 받았을 때 너무 많이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점점 간소화하게 되더라고요. 대본대로만 하자고 생각했죠. 아무 생각 없이 대본대로만 하는 것과 여러 생각을 하다 간소하게 하는 건 달라요. 난 옛날부터 배우로서 복잡한 걸 단순하게 표현하고 싶었거든요."

김혜자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어떤 것보다도 연기에 대한 설명과 '마더'의 엄마에 대한 변호를 할 때 가장 충만한 표정을 지었고, 가정생활이나 여가활동을 묻는 질문에는 말수가 줄어들었다.

"아기를 낳고 나서 '내가 어릴 적부터 하고 싶었던 게 배우였는데' 싶어 연극을 했어요. 그런데 연기를 하고 돌아와서는 집에 널부러져 있고, 밥도 안 먹고, 그러니까 남편이 '당신은 혼자 가만히 살아야 될 사람이 결혼을 해서 부대낀다' 그랬죠."

그는 '마음은 이미 절벽에서 투신했다'는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몸은 살아있지만 작품이 끝나면 죽은 것 같다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다른 거 할 때는 기운이 없어도 연기할 때만 나오는 힘 같은 게 있나 보다, 싶어요. 저는 하나님께 감사해요.
살아갈 이유를 주신 거니까요."

김혜자는 아프리카 봉사에 대한 화제를 꺼내들자 다시 연기 이야기를 할 때처럼 표정이 환해졌다.

'마더' 촬영이 끝나자마자 수단에 다녀온 그는 이번에는 에티오피아에 유아복지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다.

"아이들을 보고 에너지를 얻어요. 그곳에 가면 서울에서 내가 했던 고민들이 쓰레기처럼 느껴져요. 가슴은 아프지만 그 아이들을 위해 뭘 해줄까 좋은 생각만 하다 오니까요. 봉사하러 가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구원하러 가는 거예요."

다음 작품 계획에 대한 질문에 김혜자는 "아직 내 속에서 '마더'가 진행 중이라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답했다.

"다만 배우로서 생을 잘 마치고 싶어요. 나는 일기장에 '커튼콜만 남았다'고 쓴 지가 벌써 몇 십년이에요.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어요. (웃음) 나는 그렇게 앞일을 계획하고 사는 사람은 아니예요. 일단 '마더'가 사랑을 많이 받아서 흥행이 잘 되기를 바라는 거죠. 그래도 '마더' 잘 될 것 같지 않으세요?"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cheror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