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개봉 박찬욱 '박쥐' 주연
송강호 "'박쥐'엔 세월의 깊이가 담겼다"
배우 송강호(42)는 이제껏 관객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다.

그는 배역에 자신을 온전히 흡수시키고도 송강호 자신의 존재감도 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드문 배우다.

도통 철은 없지만 가족을 위해 분연히 나선 강두('괴물')였고, 조폭이지만 명백한 '생활인'인 형님 인구('우아한 세계')였으며, 껌을 질겅거리며 쌍권총을 휘두르는 태구('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였던 송강호는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서 친구의 아내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뱀파이어 신부가 됐다.

아무리 변신에 능한 송강호라고 해도 사제복을 입고 허공을 날아다니며 금지된 사랑에 빠져 고뇌하는 흡혈귀라니, 호기심과 기대감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26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송강호는 인간의 피를 갈구하는 신부 현상현이라는 인물에게서 기쁨, 슬픔, 연민 등 모든 복합적인 감정을 두루 느꼈다고 설명했다.

"사제로서 충실한 마음가짐을 가졌던 사람이 흡혈귀가 되면서 숱한 일들을 겪으며 갈등에 빠지고, 딜레마 때문에 압박감을 느끼고, 종말로 향해 가는 허무한 느낌들… 그런 복합적인 인간의 감정을 모두 느꼈죠."
그는 이런 감정과 고뇌, 갈등을 표출하고 폭발시키기보다 상황을 인정하고 혼란을 안으로 눌러담으며 자연스럽게 드러내보이는 쪽을 택했다.

그는 신부 상현의 딜레마를 표현할 때 무엇보다 '자조적인 느낌'을 주려 했다고 말했다.

"신부란 인간의 기초적인 욕망과 등을 진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남을 해쳐야 사는 뱀파이어라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거죠. 이렇게 금기를 깨야 하는 상황을 자조적인 느낌으로 표현하려 했어요. 원래 충실한 사람이니 남을 탓하거나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 하는 사람일 테니까요."

그는 이런 연기에 '세월'이 큰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박찬욱 감독이 1999년 '공동경비구역 JSA' 촬영 중에 출연을 제의했으니, 현실화에 10년이 걸렸다.

2007년 '놈놈놈'의 중국 촬영 중에 팩스로 시나리오를 받을 때까지도 박 감독과 송강호는 만날 때마다 틈틈이 '박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10년 전이 아니라 지금 연기한 덕에 현상현 사제에게서 깊이가 느껴질 수 있었던 거죠. 팽팽한 젊음을 가진 사제였다면 고뇌, 번민을 표현할 때 설득력이 떨어졌을 거예요."

"'박쥐'는 지금 탄생할 운명이었다"는 그는 배우로서 자신 뿐 아니라 연출자인 박 감독 역시 "10년간 차곡차곡 도약했으니 최고 정점에서 '박쥐'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감독님에게는 '박쥐'가 숙원작이자 야심작이죠. '복수는 나의 것'의 차가운 비정함, '올드보이'의 활화산 같은 열정에 더해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까지 마친 뒤였기 때문에 '박쥐'가 탄생할 수 있었을 겁니다."
송강호 "'박쥐'엔 세월의 깊이가 담겼다"
'박쥐'는 송강호에게 첫 번째 '본격 멜로물'이기도 하다.

웃음 가득한 이미지에도 그는 분명히 '멜로가 되는' 배우다.

남들의 배꼽을 빼놓고도 자신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능청스러움, 어떤 배역을 맡아도 팔딱팔딱 살아있는 인간미, 분위기를 짓누르지 않고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는 진중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엄밀히 말해 멜로는 아니지만 '밀양'에서 그는 이미 운명의 무게에 짓눌려 쓰러질 것 같은 여자 주위를 그림자처럼 맴돌며 '사랑 이야기'를 완성해 소질을 보여준 적이 있다.

송강호는 스스로 로맨스가 잘 되는 배우라고 생각하는지 물음에 박장대소부터 터뜨렸다.

"사실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했어요. 낯 간지럽기도 했고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니 잘 표현하려 노력했죠. 정말 잘했는지 평가는 보는 분들의 몫이지만…. 베드신 경우에는 촬영이 워낙 힘들기 때문에 감정의 누수 없이 집중해 찍을 수 있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다양한 요소들을 조화시킨 박 감독 스타일을 집약한 '박쥐'에는 인간을 옥죄는 굴레라는 무거운 주제에도 시종 유머와 여유가 흐른다.

이에 대해 송강호는 "관객들이 이 영화의 유머 코드를 이해해 주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대해 무겁고, 잔인한 영화라는 선입견을 품고 있어요. 하지만 '박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부러 웃기려 한 것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영화의 상황들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의식하고 연기하지는 않았지만, 충실히 그런 모습들을 담으려 했고요."

그는 '박쥐'의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에 대해 "경쟁작 20편 안에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짧게 설명하면서 관객들에게 무엇보다 "박찬욱의 작품 세계를 마음껏 체험해 달라"고 요청했다.

"지금까지 보니 '박쥐'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아요. 모든 관객이 좋아하고 사랑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뭔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는 영화가 아니라 선입견을 버리고 편하게 보면 되는 영화입니다.관객들이 박찬욱의 작품 세계를 체험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cheror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