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트레이드마크였던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배우 문성근은 요즘 한창 고구려의 왕으로 브라운관을 누비고 있으며 26일 개봉하는 스릴러 영화 '실종'에서는 잔혹한 연쇄살인범으로 등장한다.

'실종'의 주인공인 촌부 판곤은 이웃이나 낯선 여성들을 자신의 외딴 집으로 끌어들여 아무런 죄의식 없이 해치는 자다.

문성근은 섬뜩한 눈빛과 몸짓이라는 전형성에 자아도취에 과시욕이 강하다는 새로운 면모를 더해 독특한 사이코 살인마를 만들어냈다.

16일 오후 정동극장에서 만난 문성근은 "연쇄살인범을 미화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연기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판곤은 나밖에 안중에 없는 사람, 가족도, 국가도, 도덕 윤리도 없는 사람, 나는 잘난 사람인데 사회에 안 먹히고 있을 뿐이고 예술가인데 발표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실종' 촬영하러 갈 때면 아침부터 '나 외에 아무도 없다'고 중얼거리며 최면을 걸었죠."
문성근은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로 "연기는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연기관은 바뀌지 않았으나 캐릭터를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한 방식은 바뀌었고, 그 방식이 바로 "핵심을 잡아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우 무대에 섰을 때부터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왔죠. 인물의 배경, 환경까지 연구하는 교과서에 쓰인 접근법을 썼어요.

그런데 이제까지 잘 안된 연기를 반성해보니 배역을 '살아야' 하는데 '생각'을 많이 했더군요.

어떻게 접근해야 '살아질까' 생각했더니 핵심을 찾아야겠다, 그렇게 바뀌었죠."
그는 그런 접근방식으로 연기에 큰 즐거움을 느꼈던 작품으로 '실종' 외에 재일교포 최양일 감독의 액션 누아르 '수'(2007)를 꼽았다.

"까닭 모를 적개심"을 품은 폭력조직 보스를 연기하면서 "참 재미있고 신나게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것.
'실종'을 찍을 때 문성근은 최근에 어떤 젊은 배우들도 소화하기 어려운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했다.

'실종', 드라마 '신의 저울', '크라임', 연극 '변'까지 4편이 겹친 것이다.

게다가 정의를 실현하는 검사, 수수께끼로 가득찬 변호사, 전형성을 벗어난 변학도, 연쇄살인범이라는 천차만별의 배역들이었다.

"'경마장 가는 길'이 끝나갈 때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가 잠깐 겹친 적이 있지만 겹치기 출연은 해본 적이 없어요.

처음에는 될까 싶었어요.

아, 그런데 되더라고요.

묘미가 있더군요.

한 작품 촬영을 하고 차에 타는 순간 그 인물을 지워버리고, 다음 촬영장에 도착하면서 그 인물로 들어가는 거죠."
인터뷰한 날도 새벽 5시까지 드라마 '자명고' 촬영을 하다가 왔다는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찍기 전에 실제로 잠깐 눈을 붙였다가 촬영 순서가 돼서 억지로 눈을 떴다.

그 순간 '잠에서 막 빠져나온 이 모습을 찍어야 그게 진짜 연기인데'라는 생각이 나더라"며 웃었다.

'자명고'에서 호동의 아버지 대무신왕 역을 맡은 그는 기존 사극의 임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문에 "왕치고는 선이 굵지 않아 어색하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연기는 연기로 말해야 하니 시청자들이 그렇게 본다면 제가 그걸 뭐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죠. 다만 무성의하게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고민을 하고 이런 연기를 하고 있다는 점은 말하고 싶어요.

모든 왕이 저음에 굵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겠죠. 고구려 왕이라면 중국어 번역체 말투를 사용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또 대무신왕은 권력에 대한 독특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고, 호동의 조력자가 아니라 호동을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는 역할을 해야 하죠."
'자명고' 이후 차기작을 정하지 않았다는 그는 최근 학생 감독의 단편영화 출연 제의를 받아 긍정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고민하는 깊이가 이 정도야?'라고 생각하고 거절하곤 했는데 이제는 '나는 그렇지 않더라도 이 감독은 이게 고민일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 그는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도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사람들이 다들 다르잖아요.

다르다는 것에 대해 예전보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요.

저 역시 발버둥치는 사람들 중에 하나고요.

인간의 절대고독은 안 벗어지는 것이겠지만… 우습게도 '실종'을 다 찍고 나니 '소외된 사람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cheror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