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 "엄청난 속도감에 고민 안겨줘"

"이 엄청난 속도감을 어찌해야하나?"
SBS TV '아내의 유혹'(극본 김순옥, 연출 오세강)이 시청률 40% 넘나드는 인기를 끌면서 방송가에 적지않은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단순히 '막장 드라마' 논란 때문이 아니라 이 드라마가 지닌 엄청난 속도감 때문이다.

일반 드라마보다 서너배 빠른 전개 속도를 보이며 주 5회 방송 중인 '아내의 유혹'은 특히 작가들에게 새로운 드라마 작법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이 와중에 기존의 템포를 유지하고 있는 드라마들은 "전개가 너무 느려 못 보겠다"는 핀잔을 받고 있다.

과거 임성한 작가가 드라마계에 일으킨 파란과 또다르다.

◇"드라마 문법을 파괴한다"
인기작가 A씨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나 역시 '아내의 유혹'을 매일 보고 있는 열혈 시청자"라고 전제한 뒤 "그러나 '아내의 유혹'은 작가들에게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빠른 전개에 열광하는 시청자들의 눈높이를 과연 어떻게 맞춰야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아내의 유혹'은 드라마의 문법을 파괴하고 있다"면서 "말도 안되는 설정과 이야기라도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오류를 지적할 사이도 없고 워낙 빠르다보니 시청자들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과거 임성한 작가가 출현했을 때 그의 스토리 전개 속도도 빨라 작가계에 충격을 줬는데 지금 김순옥 작가의 경우는 임성한 작가가 한달에 걸쳐 쓸 이야기를 불과 이틀에 처리하는 식"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실제로 '아내의 유혹'은 엄청난 속도감을 자랑한다.

드라마 초반 은재(장서희 분)가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고 있는 상황은 다소 더디게 흘러갔지만 그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직후 복수를 준비하면서는 시종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다.

은재는 탱고나 카드 등 뭐든지 배우기 시작하면 다음날 '선수'가 돼 있다.

또 교빈(변우민)이 카드놀이로 하룻밤에 200억 원을 날리는 것이나 은재와 애리(김서형)가 충돌하는 에피소드들이 하루 이틀 사이에 반전되는 등 드라마의 템포감은 현기증이 날 정도다.

시청자 게시판의 아이디 seabee007은 "'아내의 유혹'은 인물들의 전화받는 속도마저 빠르다"고 지적했다.

◇"다른 드라마는 느려서 못보겠다"
지금까지 평일 오후 7시30분대에 기대할 수 있는 최대 시청률은 20% 초반 정도였다.

그러나 '아내의 유혹'은 현재 40%를 넘나들고 있다.

새로운 시청층을 창출한 것이다.

그만큼 이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높다는 것이다.

'아내의 유혹'의 고흥식 CP(책임프로듀서)는 "'아내의 유혹'은 남성 시청층까지 TV 앞에 앉힌 드라마"라며 "느슨한 신이 하나도 없고 다른 드라마에 비해 평균 세 배 이상 빠른 속도로 전개되며 다양한 에피소드를 소화하고 있는 점이 장점"이라고 밝혔다.

그는 "'아내의 유혹'은 남들이 150회에 할 이야기를 50회에 하는 식"이라며 "'막장드라마'라 폄하하지만 그 구성력과 재미는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고 종국에는 감동도 전해줄 것"이라고 밝혔다.

'아내의 유혹'이 이렇게 빠르게 전개되다 보니 MBC 일일극 '사랑해 울지마'나 KBS 일일극 '집으로 가는 길' 등의 전개는 상대적으로 무척 더디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작가 A씨는 "임성한 작가의 작품이 연달아 인기를 끌면서 베테랑 선배 작가들 중에서는 절필을 심각하게 고민한 분들도 있었다.

깊이는 사라지고 속도만 남는다는 고민이었다"면서 "그런데 이번에는 한 수 위의 작가가 탄생했으니 나를 포함해 많은 작가들이 앞으로의 지향점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를 해야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전했다.

방송작가들을 교육하는 김영섭 SBS 드라마기획팀장은 "남들보다 빠른 템포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고민이 필요하다.

'아내의 유혹'에 대한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 작가의 공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라며 "많은 드라마가 쏟아져나온 상황에서 지금 시청자들은 '아내의 유혹'을 통해 스피드라는 재미를 즐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스피드가 영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오는 드라마는 모두 '아내의 유혹'과 같은 스피드를 보여줘야할까.

고흥식 CP는 "현재 '꽃보다 남자'가 인기를 끄는 것은 스피드 때문이 아니다.

젊은 신인을 발굴해 사라졌던 어린 시청자들을 다시 불러낸 것 아닌가"라며 "'아내의 유혹'이 지금은 대세라고 해도 은은한 이야기, '꽃남'처럼 싱그러운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공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청자 김선미 씨는 "얼마전까지는 '아내의 유혹'을 보기 위해 '칼퇴근'을 했지만 요즘은 다소 흥미가 떨어졌다"면서 "말이 안되는 설정이 많아 허술한 구석이 종종 보인다.

자극적인 이야기와 빠른 템포에 끌리긴 했지만 이제는 향후 이야기가 어느정도 예상돼 처음처럼 흥미롭지는 않다"고 밝혔다.

고흥식 CP는 "결국은 작가의 구성력이 관건"이라며 "단순히 스피드만 있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prett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