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역사는 곧 강간의 역사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패전국의 여성은 거의 예외 없이 승전국 남성의 성적(性的)인 노리개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오죽하면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중남미 여성들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주도면밀한 성적인 약탈을 통해 메스티조라는 별도의 인종까지 만들어냈겠는가.

제56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인 '그르바비차'는 보스니아 내전이 남긴 깊은 상처를 피해자인 여성의 시각에서 그려낸 영화다.

전통적으로 정치적 색채가 강한 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어왔던 베를린 영화제는 지난해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보스니아 출신의 신예 여성감독인 야스밀라 즈바비치의 장편 데뷔작 '그르바비차'에 황금곰상의 영예를 안겼다.

즈바비치 감독은 '그르바비차'를 통해 전쟁으로 인한 성폭력에 희생된 수많은 여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내 전쟁과 성폭력의 비인간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의 제목인 그르바비차는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의 한 마을 이름이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군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이곳에 독신모인 에스마(미르자나 카라노비치)는 12살 난 딸 사라(루나 미조비치)와 함께 살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딸 사라를 위해 에스마는 바쁘고 힘든 일상을 보낸다.

딸을 먹이려고 얼마 남지 않은 돈을 털어 생선을 사고 딸의 수학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에는 시내의 한 클럽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온갖 굴욕과 수모를 견뎌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전쟁에서 전사한 전쟁영웅인 것으로 믿고 있던 딸 사라는 '전사자 가족에게는 수학여행 경비가 면제된다'는 말을 엄마에게 전하며 관청에서 아버지의 전사증명서를 떼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엄마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전사증명서를 떼어다주지 않고 결국 이리저리 뛰어다닌 끝에 어렵사리 돈을 마련해 학교에 갖다낸다.

전사증명서만 갖다주면 수학여행 경비가 면제되는데도 굳이 어려운 형편에 전사증명서 대신 돈을 구해서 지불한 엄마가 이해되지 않는 사라는 '아빠가 진짜 전사자가 맞느냐'고 엄마에게 따지고 딸의 집요한 추궁에 억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한 에스마는 꼭꼭 숨겨왔던 비밀을 사라에게 털어놓고 만다.

영화는 특별한 기교도 세련된 미장센도 없다.

특수효과 같은 건 더더군다나 없고 진보된 촬영기법이 엿보이지도 않는다.

어찌 보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영화가 갖고 있는 힘은 진정성에 있다.

짙은 정치성이 깔려 있는 '그르바비차'의 진정성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판치는 연말 극장가에서 보석 같은 빛을 발한다.

내년 1월3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서울연합뉴스) 정 열 기자 passion@yna.co.kr